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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움직이고 감동시킨 태권도 대부 - 준리총재와 국제1002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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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움직이고 감동시킨 태권도 대부

   준리총재와 국제10021 클럽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체육교육 특별고문이었고, 미국의 상하원의원 약 350여 명을 제자로 둔 태권도 거인 故 이준구 총재. 스포츠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금세기 최고의 무술인 상’을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수상한 주인공이자 미국 정부가 주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민자 203인’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등과 함께 선정되어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오로지 태권도 한길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 중심에는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그만의 철학이 있었다. 인류의 행복과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眞 ,美, 愛 운동을 창시한 이준구 총재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하고 그의 정신을 받들어 세계평화 운동을 펼치는 국제10021클럽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전 세계에 자리한 준리 태권도 인생사
그의 태권도 인생의 역사는 곧 세계사가 되었다. 한국 이민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위인을 뽑는다면 단연코 이준구(준리, Jhoon Rhee) 총재가 거론될 것이다. 163센티의 작은 키로 미국 대통령들을 제자로 두었고, 공산권이었던 소련연방 내 65개의 태권도 도장을 사상 처음으로 세운 인물이다. 전 세계 약 182개국에 6천만 명의 태권도인을 양성한 태권도 세계화의 장본인이 이준구 총재다. 미국 워싱턴DC에서는 그가 1962년 6월 28일 처음으로 태권도장을 개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28 일을 ‘준리의 날(Jhoon Rhee Day)’로 지정하기도 했다. 또 영화배우 이소룡의 발차기 스승이자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에큐펀치(Accu-punch)‘를 전수하여 1976년 5월 24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WBC/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영국 챔피언 리처드 던(Richard Dunne)을 상대로 5라운드 TKO 승을 거두게 하는 결정적인 기여도 했다.
그는 단지 태권도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스포츠계, 정계, 문화 예술계를 망라한 대단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한국의 민간외교사에서 나라의 명운이 걸린 굵직한 역할들을 해냈다. 전 인류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21세기가 낳은 전 세계인의 태권도 스승이자 철학자였던 그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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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태권도의 대부가 되다

준리는 1932년 1월 7일 충남 아산군 염치면(현 아산시 염치읍)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왜소했다. 6살 때는 옆집 여자아이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와서 어머니에게 오히려 혼쭐이 났던 적도 있었고, 초등학교 시절엔 왜소한 체격으로 힘이 센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이 부끄러웠고 치욕스러웠던 그는 중,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 태권도를  배우게 된다.

1950년 당시 유일하게 당수부(태권도부)가 있었 던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는데, 1학년에 다니던 시 절에 6·25가 발생했다. 최전방인 철원 전선에서 밥 한 숟가락과 소금국으로 허기진 세월을 보내 는 등 전쟁의 고통을 맨몸으로 겪었다. 그 후 미군 통역병으로 근무하며 간부후보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 휴전 이후 1956년 6월 육군 항공대 중위 신분으로 텍사스주에 있는 게리 공군 부대(Gary Air Force)에 6개월 과정으로 정비 교육을 받으러 갔다.

그곳에서 대위로 제대한 그는 로버트 L. 번팅씨 부부의 보증으로 1958년 봄 학기부터 텍사스주립대 토목공학과에 장학생으로 다녔다. 그들은 추후 그의 양부모가 됐다. 미국에 태권도를 알리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학까지 결심했던 그에게 닥쳤던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번팅 씨 부부의 도움으로 극복했다. 그는 대학 내에 태권도 클럽을 결성하여 미국에서 최초로 태권도를 알리기 시작했다.


​한 번은 토목공학과 4학년을 반 학기 남겨두고 미 국방부 무술 사범으로 초청돼 워싱턴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초청한 담당자가 전근 가는 바람에 일거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텍사스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는 것을 포기하고 워싱턴에 태권도장을 열기로 한다. 어차피 태권도를 전파하러 미국에 온 것이기 때문에 미국 중에서도 수도인 워싱턴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그였다. 마치 싸움에 나가기 전에 둥지를 부수어 결의를 다지는 장산곶 매처럼 그의 의지와 신념은 확고 했고 이런 그의 정신은 후에 수많은 업적을 쌓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 정치인들을 태권도 제자로 삼다
그는 워싱턴이 세계 외교무대의 중심지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외교관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태권도는 단순한 무술이 아니라 예절을 중시하는 교육이며 더욱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학교 우등생이 아니면 검은 띠를 주지 않는다고 홍보했다. 당시 4살이었던 아들 관우와 3살이었 던 딸 미미를 모델로 내세운 ‘Nobody bothers me(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해요)!’라는 캐치프레 이즈의 TV 광고는 대 히트를 기록했다. 1965년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만한 큰 사건이 발생했다. 뉴햄프셔 출신 제임스 클리 브랜드(James Cleveland) 의원이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기고 부상을 당했던 것.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즉시 클리브랜드 의원에게 전화해서 ‘태권도를 배운다면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클리브랜드 의원은 태권도를 배워 보기로 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워싱턴포스트》와 《라이프》의 기자 들을 태권도 시범이 펼쳐질 자신의 의원실로 불 렀다. 그날 첫 수업이 이 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준리 태권도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 중 검은 띠를 가장 먼저 딴 사람이 바로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이다.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던 그에게 한국전쟁으로 인해 34,000 여 명의 숭고한 희생을 치른 미국은 감사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그런 감사함의 표시로 정치 인에게는 무료로 태권도를 가르쳤다. 대신 강연이나 인터뷰를 할 때 태권도와 태권도의 나라 한국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할 뿐이었다. 이후 그는 미 국방부와 재무성, 해병대에서 태권도 지도자 로 활동했고, ‘Asian American 정책’ 국가위원회 임원, 미 대통령 '아·태 정책자문원회’ 임원도 역임했다. 이뿐만 아니라, 태권도 보호 장구를 개발하여 대련할 수 있게 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 이후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에 이바지함으로써 태권도 세계화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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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리 연결식에 참석한 미국 내 주요 인사들 (위좌측부터)Toby Roth, George Alan, Bob Livingstone, Linda, Yumi hogan, 이준구총재사모님, 김성걸이사장>


냉전의 시대, 평화의 바람을 불어 넣다
2007년 러시아의 세계평화의회로부터 고르바초프에 이어 ‘세계 평화상’을 받았던 이준구 총재의 러시아 여정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워싱턴영화사의 찰스 서덜랜드 사장의 제안으로 태권도 안무를 선보일 기회가 생긴 것. 서덜랜드 사장 역시 태권도 검은띠로 그의 제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시-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이 있었던 1989년 12월 16일부터 17일이 지나고 이튿날인 18일, 소 련 땅에서 미리 준비해간 소련국가의 태권무와 미국국가의 태권무를 선보임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양국의 국가가 태권무에 맞춰 소련 땅에서 울려 퍼지게 된다. 이 성공적인 행사는 유명인사들과의 리셉션으로 이어지고 TV, 신문, 잡지 등 에 대서특필이 되어 수많은 인터뷰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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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통해 그의 무술철학과 眞, 美, 愛 정신을 전했다. 며칠 뒤인 12월 22일은 소련의 국가 스포츠위원회 구성원들과 모임을 했다. 이 자리 에서 그는 소련의 무술 합법화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이틀 뒤인 12월 24일 국가스포츠위원회가 모든 아시안 무술 활동을 합법화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그 후 1991년 1 월 9일부터 19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일본 가라데 수련생을 대상으로 하루 18시간 11일간 세미나 를 열었는데 그때 65명의 소련연방 각국의 사범들이 일본식 가라데에서 준리 태권도로 바꾸게 됐고, 이로써 소련에 준리 태권도 보급의 길이 활짝 열렸다. 그 마지막 날 15시간을 연속으로 500개 가 넘는 질의에 전부 응답을 했던 일화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는 공산국가에서 최초로 태권도 수련을 합법화시키고 보급시켰다. 옐친 대통령의 체육·교육특별고문을 역임했고, 소련 국회분과위원회 체육· 교육 특별고문이었던 그는 암울했던 냉전 시대에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며 세계평화의 디딤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준리의 행복공식 眞, 美, 愛로 트루토피아(TRUTOPIA)를 건설하다
70여 년의 세월을 한 가지에 몰입하다 보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는 단순히 세상의 이치나 삶에 대한 터득보다는 더 깊은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바로 행복이다. 이준구 총재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답고 평화롭기를 원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만들어 낸 행복공식이 바로 眞, 美, 愛이다. “내가 진실하면 내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내 마음이 아름다워지면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모두가 나를 사랑하면 나는 행복하다.”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인류가 행복하기 위한 기본 조건인 진실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통해 인류의 공동번영과 평화를 위협 하는 폭력과 테러행위, 환경오염과 빈곤 등 많은 도전을 극복해내고 서로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어 사는 삶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바라던 트루토피아의 모습이다.
192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가 말했던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처럼 전 세계에 ‘한국’이라는 동방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었던 그의 애국심과 인류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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