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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 이영애 망수기능전승자 - 손끝으로 역사를 더듬어 시간을 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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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울 이영애 망수기능전승자

 

"손끝으로 역사를 더듬어 시간을 엮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은 고난도의 작업이다. 종류도 많고 배워야 할 기술도 녹록치 않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통을 잇는 것을 기술이나 기능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어쩐지 부족하다. 거의 예술의 경지다. 끈으로 짠 그물 모양의 장식 ‘망수’를 복원하고 재현하는 것도 그 하나다.

글 최진희 기자  사진 최재희 기자  사진제공 선아망수매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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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손재주, 남달랐던 눈썰미

가발과 신발은 1970년대에서 80년대 한국을 먹여 살린 대표 산업이자 수출 효자 품목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매듭 역시 1980년대 수출이상 당히 활성화됐었다. 손기술이 좋았던 한국의 어머니들이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매듭이 집집마다 걸 려 있는 것은 물론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었다. 한울 이영애 선생은 1980년 막내를 낳고 집에서 심 심해하던 차에 동네에 부업이 들어오

면서 매듭을 접하게 됐다.  “하면 할수록 새롭고 재밌는 매듭에 푹 빠졌어요.  당시 시누이가 자수를 하고 있었는데, 저에게 탁월한 솜씨가 있다는 걸 알아보고는 청계천에 규모가 꽤 있는 대림매듭에 한번 가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갔죠.” 면접을 보러 간 그에게 대림매듭의 사장은 매듭을 어디까지 아느냐고 물었다. 부업으로 시키는 일만 해본 정도라 기초만 안다고 했는데, 매듭 장식의 완성품 하나를 건네주더니 똑같이 해오라는 숙제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적잖이 당황했지만, 무슨깡인지 받아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 그 매듭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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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집 근처 공항시장 내에 매듭 가게가 있었고, 그곳에서 몇 가지 방법을 숙지한 후에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완성했고, 대림매듭에 가져가니 솜씨를 인정해줬다. 이후 12년간 매듭 일을 했는데, 반복되는 일이다 보니 실증이 나던 차에 지인에게 궁중공예 중 하나인 망수를 배워보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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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생님과의 운명적 만남

한울 이영애 선생은 1996년 우연한 기회에 국내최초로 조선 왕실의 전통 후수(後綬)1를 재현해 낸 망수 기능 전승자인 장순례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장순례 선생은 대한민국 1호 망수기능전승자로서 1989년 ‘국조오례의’와 ‘대한예전’의 기록과 자료를 수집해 고종을 비롯해 조선 시대 

왕들의 후수를 국내 최초로 복원했을 뿐 아니라, 선조의 여섯째 사위인 전창군 유전량과 영친 왕비의 후수를 되살려낸 후수공예의 대가다.  한울 선생이 망수의 대가인 장순례 선생의 지도하에 다회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망수(網綬)는 실로 엮은 넓은 줄이다. 큰 테두리로 보면 매듭의 한 종류로 문양이 촘촘하고 화려해 의상을 장식하거나 노리개, 장도 끈으로도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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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다회(多繪)는 모시나 삼·무명·비단실을 여러 가락으로 꼬아서 만든 끈목(여러 올의 실로 짠 끈)을 말한다. 옷을 여미고 맬 수 있는 장식품으로 전통의상에서 맵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다회와 망수는 이제 기계로도 만들수 있지만, 장인이 전통 기법으로 한올 한올 만드는 문양이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울 선생은 다회를 통해 망수를 완성하는 장순례 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그가 만드는 망수의 한 부분을 채워 나감에 보람을 느꼈다.

“기술을 전수 받던 2002년 어느 날, 장순례 선생님이 (사)아시아민족조형학회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의에 저를 데리고 참석하셨어요. 뭣도 모르고 따라갔죠. 당시 김영숙 선생님이 발표자로 나섰는데, 저를 유심히 살피시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장순례 선생님께서 제 얘기를 해 두 셨더라고요 .”

아송 김영숙 선생은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 한국학회 창립자이자 한국 복식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한국 복식 연구가다. 이를 계기로 한울 선생은 아시아민족조형학회에 가입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훗날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과 ‘KDB전통공예산업대전’ 등 굵직굵직한 공예대회에서 주요 상을 받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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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복원에 매료되다

한울 선생을 유물 복원과 재현의 길로 이끌어주신 분도 바로 이 두 분 선생님이다.  

“어느 날이었어요. 장순례 선생님이 유물 조사를 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 하시는 거예요. 일반인이 유물을 마주할 기회가 어디 흔한가요? 뜻깊은 일이고 공부도 될 것 같아 당장 따라나섰죠. 그렇게 김영순 선생님 지도하에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조사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그때가 2007년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떨림과 벅차오름은 잊을 수가 없다. 문헌이나 사진 자료로 보는 것과 직접 만져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장순례 선생은 그런 그에게 “오늘을 잘 기억해서 메모해라”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그날 조사한 유물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유소(流蘇)2와 다회 등의 수술에 구멍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는 수술 끝이 바늘을 끼워 돌린 후 뺀 구멍이 있었는데, 구멍이 없는 다회는 처음이라 신기했다. 한참 궁금해하고 있던 그때 장순례 선생은 그에게 “구멍이 없는 다회를 재현해 낸 사람은 우리나라에 아직 없으 니 이 선생이 한번 해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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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고증을 통해 조사해 봤더니, 1800년 이전 유소의 수술에는 구멍이 거의 없고, 1800년 이후 유소에는 수술에 구멍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사를 마친 후 한울 선생은 이것저것 시도하고 연구한 끝에 구멍이 없는 수술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한울 선생은 유물 복원에 푹 빠졌다. 2007년 당상관 후수를 재현한 데 이어, 2008년 영친왕비의 후수와 패옥을 복원하고, 왕과 왕세자의 후수와 패옥(국조오례의서례 도식)을 재현하기도 했다. 그해 2008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황실공예 지평선대전에서 그가 복원한 ‘영친왕비의 후수와 패옥’을 선보여 종합대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은 저에게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어요. 첫 개인전 <별전과 매듭의 만남>을 연 것도 그때고요.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김영숙 선생님이 지도를 맡아주셨어요. 망수에 관한 다양한 고증자료도 주시고, 자료를 줬으면 빨리 해보지 않고 뭐하냐며 끊임없이 자극도 주셨죠. 이때부터 김영순 선생님과의 인연은 더 깊어 졌어요 .”

 

홀로서기에 나서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장순례 선생의 갑작스런 비보를 맞이한 것도 2008년이었다. 무형문화재 후수장 지정을 목전에 두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스승과의 사별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다시 정신 차리게 해준 것 또한 김영순 선생이었다. 가르침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스승이 없어지니 허허벌판에 홀로서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 김영순 선생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스승이 못다 이룬 걸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주변 지인들도 망수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어나가 달라고 그를 격려했다. 60대 초반에 홀로서기를 한다는게 외롭고 힘들었지만, 책임의식을 느껴 망수 연구와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본격적으로 망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2009년에는 개인사업자로 등록했던 선아망수매듭연구소를 사업자로 바꾸고 망수와 관련된 전통 고증과 복원 사업에 꾸준히 참여했다. 2009년 이후 그가 복원 및 재현한 유물의 수는 30여 가지가 넘는다. 인순왕후·문정왕후·명종왕후 어보(김제시 소장)를 비롯해 태조 어진 유소(규장각 소장),  순종·원종·태종의 어진 유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익종 어진 후수 및 패옥(단국대 소장) 등을 복원해냈고,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인 당상관 후수와 영친왕 후수, 자수박물관 소장품인 당상관 후수 등을 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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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고궁박물관 유물 조사를 시작으로 유물 복원 및 재현에 참여했으니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네요. 사실 아무나 유물을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 열심히 했어요. 박물관 학예사들과도 여전히 돈독하게 지내고 있고요. 지난해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 단오제 행사용 유소를 복원한데 이어, 단종의 어진 유소(단종역사관 소장)와 태조의 여진 유소(창덕궁 소장)를 복원하기도 했죠.” 유물 복원과 함께 그가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 전승자를 양성하는 일이다. 2008년 스승이 갑작스레 떠나면서 거의 모든 작업을 홀로 해야 했고, 복식이나 매듭에 대한 다양한 문헌과 고증자료를 찾아주시던 김영순 선생도 2018년 고인이 되면서 전승자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다”는 그는 다행히 재주 많은 제자들을 만나 잘 따라와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마다 수업을 여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선아 망수매듭연구소를 찾는다. 또 금요일에는 용산공예관에서 기초서부터 가르치는 수업도 하고 있다

한번은 “이 기술은 다 공개하지 말고 우리에게만 알려달라”고 떼쓰는 제자도 있었다고. (웃음) 하지만 그는 모든 기술을 다 기록하여 남겨둔다. 망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음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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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수의 문양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

망수는 얼핏 보면 천 같지만, 하나하나 손으로 뜨개 뜨듯이 짜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각각의 문양이 있다. 지금까지 유물이나 서적을 통해 알게 된 망수 문양이 30여 개가 넘는다는 한울 선생은 이 망수 문양에 전부 이름을 달아주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숙제라고 했다. 

“유물이나 문헌 등에 여러 자료들을 살펴봐도 망수 문양에 대한 자료도 없고 이름도 없어요. 고 장순례 선생님과 이름을 붙인 문양도 있고, 제가 붙인 이름도 몇 개 있어요. 그래 봐야 장미를 닮아 장미문양, 쟁기처럼 생겨서 쟁기문양, 빗살문양, 게발문양 등이죠. 문양에 이름을 짓는다는 건 후대에게 알리기 위한 아주 중요한 수단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문양에 이름이 없으면 기록할 수도 없고, 전승자나 장인이 같은 문양을 서로 다르게 부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한울 선생은 문양에 이름을 지어 제대로 정립해 두는 것이야말로 망수의 발전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또 이름을 짓기 위해 그는 KBS <TV쇼 진품명품>을 빼놓지 않고 찾아본다. 혹시라도 비슷한 문양의 이름이 있을까 해서다. 

망수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왕이나 문무백관의 의상을 화려하게 만들었던 장식품이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후대로 전승되기는 어렵다. 이에 망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전통문양 굿즈를 탄생시키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좀 더 욕심을 내 그동안 복원·재현한 유물을 통해 얻은 경험과 연마해 온 기술을 한 데 엮어 다양한 채널을 통해 기록할 계획이라는 한울 이영애 선생. 

부업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과 노력을 더해 40여 년이 흐르고 보니 어느덧 역사와 전통을 잇는 명인이 되어있었다. 끈으로 짱짱한 그물을 엮어서 인지 그의 삶의 모습도 흐트러짐 없는 단아한 멋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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