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온의 가요산책

가수 이세온 - 새봄을 꿈꾸며 "훌랄라"

작성자 정보

  • PEOPLE365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새봄을 꿈꾸며 "훌랄라"

 900f21eed162b43bde943141a5f4a2b1_1620206869_0705.jpg


​“세상에 내고 싶었던 목소리, 이제 진짜 내 노래로 부르고 싶어요.”
가수 이세온의 이력은 남다르다. 국회의원 정책 비서로 일하다가 어느새 가수가 되어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구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스며든다. ‘나도 삶을 바꿔보고 싶다’는 희망을 현실로 이루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냐 실패이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있을 뿐.

글 이송이 기자  사진 최재희 기자


끼 많던 학창시절
가수 이세온은 학창 시절에도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평소엔 착하고 말도 잘 듣는 학생이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있을 땐 화끈하게 무대에 올랐다. “고등학교 축제 때 무대에서 한복을 입고 머리를 흔들며 록(Rock)을 불렀어요. 엉뚱한 구석이 있었죠”
그녀의 유전자엔 뭔가 당돌함이 심겨 있는 것 같다. 가수 이세온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이상하게 인도설화 에 매료되어 자연스럽게 불교 경전에까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팝송 듣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회 때는 오락 부장도 도맡아했던 그녀다. 성탄 예술제 에서는 노란 애벌레 분장으로 현대무용도 춤출 만큼 끼가 많았던 학생 이었다. 가끔은 시도 쓰고 논술대회도 학교대표로 나갈 만큼 공부도 곧잘 했지만, 공상을 즐기는 이상주의자 였다고 자신을 표현한다. ‘남도 답사 1번지’로 불리는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시기가 되었지만, 대학에 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평생 육사생(육국사관학교학생)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강직하고 정직했던 공무원 아버지의 큰 딸로 밑에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 을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손녀를 아끼던 할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있는 명문여대에 들어왔다.
부모님께 부담이 되기가 싫어서 4년간 학비와 기숙사비 를 벌어가며 어렵사리 6년 반 만에 졸업할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는 외국인 수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영어단어를 머리가 깨질 정도로 외웠고, 전라남도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도 해본 그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였다. 좋아하는 일에는 목숨을 거는 기질이 있는 그녀다.


삭발 후 100일 수행, 인도로 가는 길
대학 진학 후에도 그녀의 인생은 여느 여대생처럼 평범 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학교 캠퍼스에서 본 ‘반야심경 이야기’ 포스터를 보고 법륜스님이 이끄는 정토회 대학생회에 나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시절 혼자 공부했던 불교 경전을 다 같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료 됐었다. 1년쯤 열심히 다니던 중 지도 스님이셨던 ‘유수 스님’의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전환점이 되 었다. ‘너는 잘 나오긴 하는데 알고 나오는 거냐, 모르고 나오는 거냐?’

‘이 한마디에 그녀는 2학년 진학을 잠시 멈추고 휴학계 를 내고 당시에 정토회에서 새로 시작한 ’100일 법문’ 이라는 강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해보자’라는 생각에 머리까지 삭발했다. 그리고 정토회 에 상주하기 위한 관행인 1만배를 하게 된다.

그녀에겐 뭔가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소위 ‘똘기’ 같은게 있었다. 수행이 너무 재밌고 잡생각이 나지 않아 행복했다. 무대에 서는걸 즐길 정도로 끼가 다분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내내 바깥을 향해 있던 것만 은 아니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무엇 보다 즐겼다. “열살 때쯤 부터 였을까요. ‘나는 왜 살고 있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들었어요. 가슴 속에 항상 그런 근본적인 질문들이 있었죠.”

우연히 불교 공부를 하면서 어릴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질문, “나는 왜 사는가” 에 대한 물음이 사라졌다.

“우리가 모두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다 같이 모르고 살아 가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과 서로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현자 같은 대답에 놀랐다. 보통은 온갖 방황에 싸여 있을 20대 청춘에게 그토록 명확한 방향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다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그 역시 머릿속에서 나온 방향이 아니라 머리까지 삭발하고 100일 수행을 하며 열성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6개월에 걸친 절 생활은 정말 흥미로웠다고 기억하는 그녀다. 삭발을 하고 나니 뒤이어서 삭발하는 학생들이 생기고 결국 유수 스님은 가발을 쓰고 생활하기를 권하게 된다. 새벽 4시 반에 시작하는 아침 예불 시간마다 108배를 하는 와중에 가발이 떨어져 내려서 여간 애를 먹었던 게 아니었다. 옆에서 같이 절하던 도반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발에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타고난 끼로 법당 에서 스승의 날에 배꼽티를 입고 춤을 춘 사람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한다. 그때 부터 정토회 안에서의 그녀의 별명은 ‘바람난 비구니’가 되었다.
머리가 아닌 실천, 그녀의 발길은 문득 인도로 향했다. 1999년 그때는 인도여행 도 지금처럼 흔할 때가 아니었다. 인도는 오지로 통했다. 그녀는 인도 안에서도 더 오지마을로 들어갔다. 불가촉 천민을 교육하고 자립과 생활을 돕는 ‘수자타 아카데미’ 에서 발을 멈췄다.
6개월간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민들의 농사까지 돕는 일과가 이어졌다.

“인도가 체질인 것 같았어요. 보람 있는 생활이었어요. 제 손으로 만든 밥과 약과 생필품들이 건네질 때 그들의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는 그대로 다시 제 가슴으로 들어와서 따뜻함이 되더라고요.”
한번은 오디샤(Odisha)주에 해일이 일어났었단다. 당시 5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에도 자원봉사자들 전체가 다시 그곳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온 땅에 동물과 사람 시체가 즐비한 광경이 펼쳐져 있는데 해일이 휩쓸고 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청명했다.
“너무 무기력했어요. 인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죠. 자연재해 로 생명이 사라져가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버텨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닌것이 인간이란 걸 처절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900f21eed162b43bde943141a5f4a2b1_1620206950_1313.jpg

정치입문, 국회의원 비서로
그녀는 언젠가부터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나’라는 존재를 표현하고 싶었다. 어릴 땐 축제 무대였다면, 대학에서는 내면을 탐구하는 불교 철학이었다.

그리고 다음엔 자연스럽게 정치로 흘렀다.
인도에 다녀와서 복학한후 그녀는 우연처럼 필연처럼 학교 총학생회에 몸을 담았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찾던 차에 마침 전학협(전국학생회협의회)의 활동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숙명여대 33대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게 되었다. 긴 자원봉사와 절 생활, 그리고 학비를 벌어야 하는 일정으로 휴학을 밥 먹듯이 해온 터라 4학년 때는 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이미 국회에 취업이 되었다.


인도를 다녀온 직후 여러 출마자 선배들의 선거 캠프 에서 일하며 이미 정당 생활을 하고 있었고  2000 년 이후 모든 총선거와 지방선거 에서 현장정치를 맛봤다. 하지만 국회에서 2년 정도 일하자 더는 꿈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년 국회의원 비례대표, 서울시의원 비례대표 등 출마도 여러 번 했었지만, 더 늦기 전에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싶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이 정치 활동이니까요. 저는 제가 가진 장점으로 정치를 하는 거죠. 노래는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방법일 수 있죠.”


나는 가수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치 선배들은 그녀에게 “너는 지금 네가 가진 99% 가능성을 버리고 1%의 가능성 만을 쫓아가는 것”이라며 다시 돌아올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1%의 가능 성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저 자신이 더 하고 싶은 것을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다. 사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가수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가 좋았어요. 아빠는 LP판을 5,600 장이나 갖고 계셨죠. 한쪽 벽면이 다 LP판으로 가득 차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아빠의 영향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릴 적 꿈을 실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릴때는 누구나 이런저런 꿈을 꾸게 마련이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직장을 잡으면서 사람들은 현실을 인식 한다. 그저 내 팔이 뻗어 나갈 수 있는 정도의 것, 내 다리가 닿을 수 있는 정도의 현실 속을 살아간다. 어릴적 꿈일랑 추억 속으로 묻어두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세온은 여러 갈래 길을 돌고 돌아, 끝내 어릴 적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녀는 꿈 앞에서는 겁이 없는 편이라고 당차게 말한다.
“하고 싶은 일 앞에서 내가 가진 깜냥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해보지도 않고 미리 겁먹지 않는 거죠. 그냥 해보는 거죠” 라고 말한다.

자신감과는 좀 다른 차원이다. 내가 그럴 만해서, 나 에 대해 자신이 있어서 갖게 되는 자신감이 아니다. 사회에서 어떤 틀이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묶어 놓는 것에 대해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전 크게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내 목소리를 세상에 내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무언가 다시 시작할 힘을 갖게 되기를 바랄 뿐이죠. 인생의 수많은 희로애락을 위로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 한복판에 서 있고 싶은 거예요.
멋진 말이지만 쉽지 않은 얘기다. ‘성공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맞닥뜨려서 해볼 수 있으니 겁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리 특별하지 않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뼈에 꽂히는 명언이다. 잘난건 없지만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큰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니 겁날것도 없다. 그냥 해보는 거란다.


가수 생활을 이어가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얼까?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어렵죠. 현실과 이상은 다르니까요. 대한민국에서 가수라는 이름으로 살려면 소위 ‘뜬 가수’여야 하거든요. 뜨지 못한 가수들은 생활을 위해 ‘투잡’ 이나 ‘쓰리잡’을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 에너지를 연습에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비노바 플랫폼’이란 단체를 만들었어요. 문화 예술 체육인 들의 연대인데, 궁극적으로 예술인 기본 소득법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혼자만 성공하려는 야심은 없다. 주변의 다른 문화 예술인 들 과 함께 걸어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가 초년에 정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제 알겠다.

900f21eed162b43bde943141a5f4a2b1_1620207006_7041.jpg

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가수다!
“노래는 영혼을 살리는 보약이라고 생각해요. 힘들게 살아내야 하는 우리네 인생의 쉼표일 수도 있고 때론 치료제가 돼주기도 하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녹아들어 가서 어루만져 주고 달래주고 때로는 같이 울어 줄수 있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요. 따뜻함과 위로와 평온함 을 전하는 위로자가 되고 싶어요”
가수 이세온이 말하는 ‘되고 싶은 가수’의 모습이다. 그녀는 언젠가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는데 바로 앞에서 울고 있는 하객을 통해 되려 감동 받았다고 했다. 무대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감동 받았다고 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 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가수 이세온이 노래하고 싶은 이유이자 목적이다.
“노래를 통해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래요. 기술이나 감성을 뛰어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싶어요. 그 메시지는 때로 사랑 일수도 있고, 아픈 상처에 대한 위로 일수도 있고, 어떨 때 는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게 하는 배려 일수도 있겠죠. 우리네 삶에서 필요한 모든 아름다움을 전달하는데 가수만큼 효과적인 직업도 없다고 생각해요. 마음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직통 코드 같은 거니까요.”

그녀는 수많은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엘 가겠다며 가출을 하고, 대학에 가서는 불교에 빠져 삭발을 감행했다. 그리고 봉사를 위해 인도에 갔다. 다녀와서는 총학생회 활동도 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치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은 그녀에게 켜켜이 경험 되고 삶의 방향을 주고 의미를 찾게 했다. 그리고 결국, 처음엔 다소 무모해 보였던 가수의 길에 와 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나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야기해준 온갖 경험들도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해야 하는 가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었다. 가수 이세온은 지금 그녀가 바라는 대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가수가 되어가고 있다.

      

@PEOPLE365 & people365.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자료

PEOPLE365 TV


이세온의 가요산책


코렌코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