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화 아나운서 -"세월을 잊은 그녀의 목소리" 작성자 정보 PEOPLE365 작성 작성일 2023.12.08 11:54 컨텐츠 정보 조회 목록 SNS 공유 본문 행복한 세상 이성화 아나운서 노년은 소멸의 서막이 아니라 삶의 절정일 수 있다. 괴테는 자신의 역작 《파우스트》를 83세에 완성했고,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라이트는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겐하임미술관 건축에 매달렸다. 한국 민영방송 최초 아나운서의 타이틀을 가진 이성화 아나운서는 85세의 나이에도 세월을 비켜간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선다. 에너지 넘치는 백발의 DJ는 노년이 청년보다 불행하다는 편견을 상쾌하게 뒤집는다. 글 임숙경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사진제공 관악fm 세월을 잊은 그녀의 목소리 사진 촬영을 위해 장시간 포즈를 취하던 이성화 아나운서가 중심을 잃고 살짝 휘청거렸다. “나이가 드니 발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며 미소를 짓는 그의 팔을 붙잡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검은색 트위드 투피스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흰색 타이즈를 무릎까지 올려 신은 그는 라디오 방송 녹화와 인터뷰 내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고요한 아침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 리처럼 맑고 청명하게 귀에 꽂히던 그의 여전한 목소리와 세월에 약해진 그의 체력이 서글프게도 명확한 대비를 보인 탓이리라. 그래서 더욱, 우리가 아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으로 와 닿는다. 60년 전 목소리 그대로 돌아온 백발의 아나운서 85세에 현역 라디오 디제이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관악공동체라디오에서 운영하는 관악FM(10 0.3 ㎒)의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 <쾌지나 청춘>을 통해 월요일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동안 만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성화 아나운서를 비롯해 가수, 교사, 언론인 출신 시니어 6명이 요일별로 방송을 책임지는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모두 자원봉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성화 아나운서는 월요일 방송을 책임지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의 진행을 맡은 지 어느덧 8년째. 2015년 5월 11일 첫 방송 이후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간 게스트만 줄잡아 400명이 넘는다. 그는 단순히 프로그램 진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게스트를 직접 섭외하고 취재하며, 방송 후에는 개인 블로그에 방송 내용을 올려 홍보까지 하는 등 1인 다역을 해내고 있다. 프로그램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버모델 남금희 여사를 비롯해 수필가인 오경자 교수, 수채화가인 신정무 화백, 철학자 전택원 박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출연했다. 모두 이성화 아나운서가 직접 섭외한 인물들 이다. 전철과 버스를 이용해 매주 녹음실로 출근을 하는 그는 아직 뒷방에 물러앉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방송과 언론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원봉사든 임금을 받든,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상관없이 책임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진행자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 자신에게 소홀하거나 나태 해질 수가 없습니다.” 한국 민영방송 최초의 아나운서 지금은 최고령 아나운서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그에게는 원래 ‘최초’라는 수식어가 더 많이 붙어 다녔다. 1960년 MBC의 전신인 부산MBC의 개국 아나운서로 입사하면서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이후에도 서울MBC 개국 아나운서, RSB 라디오 서울 개국 아나운서, TBC TV 개국 아나운서의 타이틀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전쟁 통에 피난을 가서 학창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배짱 좋게 응시해 합격을 거머쥐었다. 난다 긴다 하는 명문대학생들과 경쟁을 벌여 450 대 1의 경쟁을 뚫고 10명의 아나운서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방송이 뭔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어요. 당시에 집에 라디오도 없었어요.(웃 음) 목소리 좋다는 칭찬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었고, 센스와 눈썰미도 있었어요. 성격이 워낙 명랑해서 그런지 겁도 안 냈던 것 같아요. 입사 시험 때 스튜디오에 10명씩 들여보내 원고를 읽으라고 했는데, 해본 적이 있었어야죠. 그냥 앞 사람 하는 것보고 그대로 흉내 내서 읽었어요 .” 그의 타고난 목소리는 방송계에 정평이 나 있었다. 또랑또랑하게 귀에 정확한 데시벨로 꽂히는 그의 목소리를 두고 연극연출가 오사량 선생은 ‘5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당시 80% 이상이 한문으로 쓰인 신문 논설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실력에다 두둑한 배짱과 순발력까지 갖춰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공개방송 진행자로 낙점을 받았다. 매끄러운 진행 실력에 타고난 애드리브 능력을 발휘해 생방송을 앞둔 방송 PD들이 이성화 아나운서부터 찾을 정도로 아나운서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JTBC의 전신인 TBC 동양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 언론 통폐합으로 KBS 로 넘어간 다음에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최장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초대 진행자로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진행을 맡아 대중들에게 이성화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당시 팬레터 세례를 받을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이성화 아나운서는 자신이 당시 얼마나 높은 인기를 누렸었는지를 몇 해 전 부산 방문 당시에 실감했다고 한다. “부산MBC의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부산을 방문했을 때였어요.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제 목소리만으로도 저를 단번에 알아보시더라고요.(웃음) 세월이 그렇게나 지났는데도 제 목소리를 기억해 주시니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뿌듯했어요.” 30년 공백 깨고 인생 2막을 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그는 방송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다니며 스튜디오 한 쪽 의자에 아이를 재워가면서 방송 열정을 불태웠던 그가 결국 20년 방송 생활을 접고 사표를 낸 것은 1980년. 지방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전화로 회사를 그만두라고 재촉하는 통에 결국 사표를 내고야 말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일을 그만두고 딱 4년이 지나니 미치도록 방송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 사이 방송 환경이 바뀌어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30년간 그는 방송 생활을 접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런 그가 2013년 11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70대 중반의 나이었지만, 30년의 긴 세월에도 변치 않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다시 섰다. TBC 재직 시절 함께 일했던 옛 동료의 권유로 관악 FM과 인연을 맺고 <굿모닝 세상의 아줌마들> 프로그램의 한 코너인 ‘다문화인을 위한 우리말 회화’ 진행을 맡으며 진행자로서 다시 복귀를 알렸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노년층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공동체라디오의 취지에 공감해 참여하게 됐어요. 방송 제의를 받고 프로그램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이 많았는데, 30년 만의 복귀인 만큼 제가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당시 다문화인들이 국내에 많이 생길 때였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말을 배우는 것이겠구나 생각했죠. 무엇보다 제 재능이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뿌듯 했어요 .” 목소리 허락할 때까지 마이크 앞에 서고파 3년 가까이 ‘다문화인을 위한 우리말 회화’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쾌지나 청춘>의 진행을 맡아 어느덧 매주 월요일 관악FM 청취자들과 만나온 것이 9년이 다 되어 간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다시 방송을 시작하면서 관악FM의 정년을 없앴다”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는 욕심 내지 않고 앞으로 목소리가 허락할 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라디오로 시청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음성에는 감정이 담겨 있어요. 떨림과 호흡이 감정으로 전달되죠. 그래서 라디오는 정서와 정서가 연결되는 매력이 있어요.” 몇 해 전에는 여든의 나이로 드라마를 쓰고 싶어 공부를 하고 한국방송작가협회의 시험에 통과하는 기쁨도 누렸다. 하고 싶은 건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방송 일을 쉬어야 했던 30년 세월에 아쉬움이 없을 리는 없다. “40년 전에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할 때가 있어요. 솔직히 아쉬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인생에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 그는 아흔이 넘은 남편의 식사를 직접 챙기면서도 건강을 위해 시간이 날 때면 공원을 걷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철과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하루에 2∼3시간은 PC 앞에 앉아 있다. 프로그램 홍보를 위해 블로그를 관리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방송이고, 마을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방송이지만 대본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라는 그는 나이와 열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때로 그 속도에 짓눌려 세상의 끝자락에 선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만 뒤쳐진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저항하다 사라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순응하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걷기도 할 것이다. 삶이 제 각각이듯 노년을 살아가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이성화 아나운서처럼 걸어온 길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헤드폰을 끼고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의 아나운서를 바라보며 문득 김행숙 시인의 <다정함의 세계>의 시구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PEOPLE365 & people365.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공유 관련자료 이전 마음주치의, 노래하는 의사 김창기 오늘도, 당신의 마음에 안부를 묻습니다 작성일 2024.03.25 14:27 다음 사진작가 유재력 -순간의 기록자,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작성일 2023.08.14 09:34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