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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유재력 -순간의 기록자,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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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세상 사진작가 유재력

 

일흔 살 넘어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할 일이 너무 많이 생겨 즐겁다는 한 예술가가 있다. 유재력 사진작가다. 사진이라는 운명을 만난 지도 어느새 70여 년이 다가온다는 그는 지금 일생일대 역작이라 할 만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 중이다. 이름하여 ‘오늘을 사는 한국인’ 시리즈를 실행으로 옮기느라 분주한 그를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만났다.

글 김도현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사진제공 유재력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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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기록자,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스포티한 푸른 셔츠에 카고바지 차림의 그가 인사동 한복판의 한 카페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등에 둘러멘 커다란 백팩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렌즈, 무게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 촬영 장비들이 들어있건만 전혀 버거운 기색 없는 가뿐한 발걸음이다. 베이지색 빵모자와 흔하디흔한 검은색 뿔테 안경조차 그가 쓰고 있으니 요즘 말로 ‘힙’하게 느껴졌다. 

제법 오랜 시간 진행된 인터뷰에도 그는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말투는 분명했고 어조에는 강단이 있었으며 오래된 옛이야기도 너무나 생생해 절로 몰입됐다. 무엇보다 반짝이는 눈빛에 여전한 총기가 서려 있었다.

“선생님,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나요?”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끝내 그의 나이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호적엔 1940년 만(滿)으로 따져도 올해 나이 84세. 하지만 누가 그를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80대 노인으로 볼 것인가. 그의 패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을 향한 끝없는 열정이, 또 새로운 꿈을 향한 포부가 마치 청년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국내 사진 예술사와 광고업계에 두루 큰 획을 새기고 여전히 꺼지지 않는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사진작가 유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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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난 물난리를 기록하는 괴짜

학창시절 그는 촉망받는 수재였다. 특히 수학과 과학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보여 어려서부터 물리학자를 꿈꿨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진로에 변화가 생긴 건 역설적이게도 과학 수업이 계기가 됐다. 수업 시간에 사진기의 원리를 배운 게 고등학생 유재력의 호기심을 폭발시켰다. 그는 당시 흔하게 구할 수 있었던 미군 레이션박스와 아버지의 확대경을 이용해 사진기 만들기에 도전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손수 카메라를 구해줬지만,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남대문 책방골목을 뒤져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사진 관련 책자를 구해 읽고 고장 난 카메라들을 사와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길 반복하며 사진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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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처럼 비가 쏟아진 어느 여름날 밤, 그가 살던 동네에는 물난리가 났다. 재빨리 카메라부터 챙긴 그는 둥둥 떠다니는 가재도구들을 수습하느라 여념 없는 부모님을 돕기는커녕 그 모습을 렌즈에 담기 바빴다.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고3 수험생에게는 인생에서 더없이 결정적인 날, 바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입시가 있던 전날에도 카메라를 조립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통에 결국엔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후기시험을 통해 한양대학교 기계과에 입학했지만, 무늬만 공대생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다. 학보사에 들어가 교내외 사건·사고 현장을 누비며 카메라를 들이댔으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진을 분석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새 공학도로서의 꿈까지 접은 그는 외국의 사진 서적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으로 되어있는데 실제 출생연도는 1937년이요.”  일념 하나로 학적마저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로 바꿨다. 

온통 사진에 빠져, 사진만 바라보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신문명의 선구자로 ‘우뚝’

1960년,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한국경제신문사에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이듬해 5·16 사태가 발발하며 혼란 속에 신문사는 문을 닫았고 곧 적(籍)을 옮긴 동화그라프에서 새로운 사진의 세계를 접했다. 이전까지 흑과 백으로 표현된 사진만 접하고 찍어 오다 천연의 색을 입은 컬러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한번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질의 그는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어느새 신문명의 선구자이자 대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때마침 산업화 열풍과 함께 소비시장이 커지면서 상업 사진의 시대가 도래했다. 월간 《주부생활》, 《여성동아》, 《여성중앙》 등 가계를 책임진 주부들을 겨냥한 여성지들이 줄지어 창간했고 그때마다 그를 모셔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패션이면 패션, 요리면 요리, 그만큼 멋스럽고 맛깔스럽게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가 없었고 광고주들이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광고 사진의 시대가 그를 만든 것인지, 그가 광고 사진의 시대를 연 것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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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건 ‘유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품목에 구애 없이 그에게 광고 사진을 맡기려 몰려드는 이들로 스튜디오의 문턱이 닳았다. 최고의 광고 사진가 유재력, 본격 상업 사진 전문 스튜디오로서 ‘유 스튜디오’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 와중에 그는 사진가 모임인 ‘신선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갈고 닦았다. 한편으론 출판 및 캘린더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혀 유문화’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사업 확장은 화가 됐다. 새로 시작한 사업에서 적잖은 손해를 본 데다 오랜 시간 앞만 보며 달려오며 몸과 마음이 지친 그는 돌연 말레이시아행을 결정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쓴 신화

1983년 혈혈단신 건너간 말레이시아에서 그는 새롭게 시작했다. 현지에 ‘Ryuk Studio’를 세우고 다시금 사진에 정진했다. 인근 한인 식당의 메뉴판 사진을 찍는게 가장 큰 일감일 정도로 시작은 미미했다. 하지만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곧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사업은 금방 본궤도에 올랐다. 이윽고 그의 명성은 한인사회를 넘어 말레이시아 전역에 이르렀다. 

1988년 말레이시아 관광청의 ‘Visit Malaysia Year  1990’ 캠페인의 메인 사진가로 외국인인 그가 선정됐다. 세계 각국에서 온 모델들과 함께 나라 곳곳을 돌며 말레이시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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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뉴욕에서 199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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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영화배우 장국영>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현지 유명 사진가 및 사진 단체들과의 교류가 두터워지고 강의도 진행하게 됐다. 말레이시아 페라크(Perak)주 왕가의 공식 사진가로서 로열패밀리의 사진도 전담했다. 1999년엔 말레이시아가 국가적 명운을 걸고 유치한 포뮬러원(F1)의 공식 사진가로 선정돼 기념 책자 발간을 책임졌고 지역 곳곳을 누비며 작품집을 남겼다. 말레이시아 국가 지정 사진가와 다름없는 지위와 명성을 누렸고 실제로 당시 페라크(Perak)주 아즐란 샤아(Azlan Shah) 국왕이 수여한 훈장까지 받았다. 그의 이름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장국영, 매염방 등 중화권의 유명 연예인과 미하헬 슈마허, 타이거 우즈 등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을 렌즈에 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근교의 한 이민자 마을에서.JPG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근교의 한 이민자 마을에서>

 

사진을 제약하지 말라

무에서 유를 이룬 말레이시아에서의 17년. 그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 온 가족들과 국내 사진계 후배들의 간곡한 요청에 귀국을 단행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2000년, 이미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사진계에서도 일가를 이룬 원로의 위치였지만 그에게 쉼이란 없었다. 사파(SA PPA)사진학원의 고문으로, 명지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강사로 후학 양성에 나서는 한편, 발레리나 문훈숙 자서전, 설치미술가 심영철 교수의 작품집 등을 함께했고 경남 지역 및 리얼리즘 다큐멘터리 작품 발표와 크고 작은 개인 전시회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가다듬었다. 광고 사진을 산업사회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고 광고 사진가에겐 작가 의식을 기대하지 않는 세태가, 그리고 이에 위축된 후배들이 안타까워서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를 전시회로 연계해 지금껏 ‘충무로 7인전’이라는 발표 기회를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일반 대중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 다양한 잡지에 사진 관련 글을 연재하고 기고하며 개인 블로그와 페이스북도 개설했다. 한 장 한 장 소중한 작품을, 한 자 한 자 자신의 생각을 직접 편집하고 타자해 정성스레 올렸다. 사진을 취미로 하는 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의 작품과 글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료이자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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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든 열정적인 그는 아무리 기초적인 질문도, 아무리 귀찮은 요구도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이가 대뜸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해도 그것이 사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 준다. 그렇게 누군가가 사진에 관심을 두고 저변이 넓혀지는게 보람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나눔이란 것이다. 

“사진이 예술이다 ?  전 그렇지 않다고 봐요. 이 또한 사진을 묶어두고 제약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누구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마음에 든 순간을 포착해 사각의 프레임에 담을 수 있습니다. 누가 찍었든, 어떤 순간이 담겼든 그 자체로 세상에 유일무이한 기록이자 소중한 창작이죠.” 그는 비싼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화소의 환상을 버리고 신형이 나오면 금방 헐값 되는 기재에 대한 투자도 줄이고 가방 무게도 줄이세요. 대신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좀 더 많은 곳에 촬영 여행을 떠나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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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누를 힘이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기록

그가 사진이라는 운명을 만난 지도 어느새 7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수백, 수천 종의 카메라와 렌즈가 그의 손을 거쳐서 갔고 수십만, 수백 만의 기록이 그에 의해 쌓였다. 지금도 그는 태화강을 주제로 한 화보를 만들기 위해 수시로 울산을 오가고 있다. 군부 독재에 신음하는 미얀마의 어린이들을 위한 사진전도 준비 중이다. 그가 만나 렌즈에 담았던 그 사람들을 떠 올리며 오래된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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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역작도 준비 중이다. 이름하여 ‘오늘을 사는 한국인’이 그것이다. 한 인물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조명하고 보여주는데 한 명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를 시리즈로 엮겠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기준은 유연하게 정했다. 특별히 잘 났거나, 유명한 이보다는 어느 한 측면이라도 본보기가 될 만한 이들을 섭외해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해당 인물과 가능한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다시피 곁을 함께 하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겠다는 포부다.

그는 이 모든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여 추진하고 있다. 대목 대목마다 복병이 도사려 순탄치 않고 너무도 거대해 끝을 맺을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저 할 일이 있고 꿈이 있다는 게 그를 쉼 없이 전진하게 만든다. “60세가 됐을 땐 이제 정리할 시기인가 싶었는데 70세를 넘고 나니 이 나이에도 즐거운 일들이 있으니 그래도 살만하구나! 느꼈어요. 그런데 80세가 넘고 나선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 일이 너무 많이 생겨요. 

그래서 즐겁습니다.”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있는 한 그의 기록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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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유재력은 1960년대 신문·잡지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1970년 ‘유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사진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이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을 무대로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명지대학교에서 사진학 강의를 했다. 현재 (사)한국광고사진가협회 고문이자 한국디지털사진가협회 고문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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