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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우겸 박경수 -필장이 만든 붓한자루에 산맥은 꿈틀 거리고, 구름은 숨을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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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우겸 박경수


필장이 만든 붓한자루에

산맥은 꿈틀 거리고, 

구름은 숨을 죽이고

나고 자란 고향을 무작정 떠나 강원도 춘천에 터를 잡았다. 붓에 사용하는 털은 북쪽 지방 동물의 털이 가장 좋다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전라남도 화순에서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오직 좋은 붓털 소재를 얻기 위해 이주를 감행했다. 필장의 선택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에게 붓이란 그런 의미다.

글 최진희 기자  사진 김성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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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기법 고수한 나만의 붓

무형문화재 우겸 박경수 선생의 아버지는 전라도에서 손꼽히는 필장(筆匠) 이었다. 어려서부터 붓 만드는 일을 보고 자라서인지 그 역시 당연히 붓을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다행히 붓 만드는 일이 마냥 재밌고 좋았다. 우겸 선생이 본격적으로 붓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다. 붓을 만들기 시작하고 70년대 말에서 80년대 후반까지는 남부 지방, 특히 부산과 마산 등지의 큰 필방의 붓은 그가 다 만들었다. 한 달이면 20일은 날을 세워가며 붓을 만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붓 만들기에 열중하던 그는 문득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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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꼭 양모로만 만들어야 할까?’. 우겸 선생은 그의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에게 그것을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붓털의 종류는 여러 가지고 추운 지방에서 나는 털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우겸 선생은 그길로 짐을 꾸려 전라남도 화순에서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으로 터를 옮겼다. 

“춘천에 정착한 게 1988년이었어요. 그 때부터 붓털 재료를 수집하느라 강원도 전역을 돌아다녔어요. 양모와 황모(족제비 꼬리털)는 물론 청설모, 너구리, 개, 말, 여우, 호랑이 등 다양한 붓털을 수집했죠. 당장 생계가 걱정이었는데,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밤낮 없이 붓을 만들어 팔면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밖에 안 된다.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만 만들 수 있는 붓을 만들어라’라고요. 말할 수 없이 고마웠죠.” 새로운 붓 만들기에 열중하던 어느 날, 키우던 앵무새가 죽고 말았다. 애지중지하던 앵무새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그는 앵무새 꼬리 깃털로 붓을 만들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만류했지만, 결국은 만들어 교동에 살던 소설가 이외수 선생에게 가지고 갔다. 

“붓이라고 만들긴 했지만, 붓 머리가 봉두난발이었어요. 그래도 이외수 선생님은 귀하고 예쁜 붓이라며 그 붓으로 작품을 그리셨어요. 그리고는 다 좋은데, 붓이 이것보다는 조금 길었으면 더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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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닭이 생각났다. 닭갈비로 유명한 춘천에는 닭이 흔했다. 재료는 구하기 쉬웠지만 닭 털로 붓을 만들기는 녹록지 않았다. 거칠기가 염소나 족제비 등의 모필과는 많이 달랐다. 

장 어려운 것은 기름기를 빼는 일이었다. 우겸 선생은 기름기를 빼는 데 기계식이 아닌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왕겨를 태워 재를 뿌리고 다리미로 눌러 기름을 빼주는데, 이때 다리미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 과정을 7, 8회 반복한다. 닭털붓을 붓다운 붓으로 만들기까지 5년여 시간이 걸렸다. 닭털 외에도 공작, 올빼미, 장끼 등 다양한 조류의 깃털로 붓을 만드는 필장으로 거듭났다.


작가들의 소울메이트 되다

“닭털 붓을 만들어 이외수 선생님께 달려갔어요. 처음엔 길이 안 나서 붓 사용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외수 선생님은 붓을 탓하지 않고 붓 자체에 적응 하면서 밤새 독특한 그림을 완성해 내곤하셨어요. 그리고 쓸 때마다 다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좋아하셨죠. 이후로 이외수 선생님의 작품들은 모두 저의 닭털 붓으로 작업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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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겸 선생의 닭털 붓은 만들면 만들수록 섬세해졌다. 또한, 결이 살아 있어서 문필가들과 화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 작가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고인이 된 죽전 구석고 선생 역시 그의 깃털 붓의 열렬한 팬이었다. 

구석고 선생은 깃털 붓 퍼포먼스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화백이다. ‘깃털 붓’을 활용하여 용, 구, 복, 불 등 거친 붓의 터치감과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평이나 있었는데, 이처럼 특정 소재 영역을 고집하지 않고 늘 새로운 실험정신이 깃든 작품활동으로 인정받으며, 세계 각국에 초청돼 민간외교관으로 한국의 얼을 알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 옆에는 항상 우겸 선생의 깃털 붓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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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서관 김석배 화백, 최병진 화백, 고중광 스님, 고 이부성 선생 등 많은 작가들이 우겸 선생의 깃털 붓으로 그들만의 작품 세계를 이어 나갔다. 

“붓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작업은 정성입니다. 털을 고르고, 기름을 빼고, 털을 고루 섞어 펼쳐주고, 다시 모아서 한지로 감싸 붓대를 재단하고 결합한 다음 마지막으로 풀에 붓을 담가 뾰족한 형태로 고정시켜 주는데, 하나의 작업을 수차례 반복해야 해요. 그때마다 정성을 쏟아야 좋은 품질의 붓이 완성됩니다. 붓을 만들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붓을 만드는 시간이 제일 맘이 편안해요.” 

춘천에 와서 닭털로 붓을 만들고 나니, 과거 문헌에 닭털 붓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겸 선생의 두 아들 모두 한국전통 문화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공부하던 중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독좌음’에서 ‘계모필기침변장(鷄毛筆記枕邊牆)’이라는 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말은 ‘닭털 붓으로 베갯머리 벽에다 기록하노라’라는 의미로 조선 시대에도 닭털 붓이 사용됐다는 말이다. 이는 사라졌던 문화를 우겸 박경수 필장이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복원을 한 셈이다. 


3대째 필장집안 문화를 보존하다

강원도 춘천으로 터를 옮긴 후 우겸 박경수 선생이 이룬 업적이 많다. 강원도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마침내 2005년에는 대한민국의 명인이 됐다. 또, 2013년에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게다가 그의 작업실인 경춘필방(京春筆房) 옆에 4년 전 ‘붓 이야기 박물관’을 마련했는데, 올해 정식으로 등록 인가되어 붓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좋은 붓털을 찾아 춘천으로 왔을 당시엔 좋은 털은 많은데 붓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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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겸 박경수 선생이 만든 붓으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붓 이야기 박물관'>

다행히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서예가와 화가들이 제가 만든 붓이 서예의 필법과 한국화의 운필을 다양하게 만들어준다며 좋아해 주셔서 지금에까지 온 것 같아요.”

주변에 붓을 만드는 이가 없어 외로웠지만, 이제는 두 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니 흐뭇하다. 

큰 아들은 고려대학교 민속학 석박사를, 둘째 아들은 한국전통문화대학에서 보존과학 석사를 마치고 필장의 이수자로 박경수 명인을 곁을 돕고 있다.  

“자식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게 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일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성공한 삶이에요. 강원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됐을 때 저희 아이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버지라고 했거든요. 저 역시도 아들들이 뒤를 잇는다고 했을 땐 미덥지 못한 마음이었는데, 큰 아들이 2015년에, 작은아들이 2019년에 만든 붓으로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수상을 하더라고요.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요.” 

이로써 우겸 선생 집안은 3대를 이은 필장 집안이 됐다. 특히 두 아들은 학문적 이론 부분에서나 실제 제작 부분을 모두 아우르는 붓장이라는데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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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붓을 만들었어도 여전히 붓 만드는 게 좋다는 그는 좋은 붓을 만드는 데 아직도 목마르다. 족제비털을 이용하여 만든 휴대용 황모필은 특허까지 받았고, 그 어디에도 없는 배냇머리 붓(태모필) 역시 그가 만든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제품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자신의 맘에 쏙 드는 붓을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금도 새로운 붓 털 소재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붓으로 만들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박경수 필장은 1974년 처음 붓 만들기에 입문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붓에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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