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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유 김정아 "디자인으로 삶을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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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유 김정아


"디자인으로 삶을 창조하다"


1991년 동양인 최초로 유럽패션 메카인 이탈리아 알타모다 컬렉션에 공식 초청받아 ‘패션으로 로마를 정복한 동양의 여인’이란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랑유 김정아. 이어 프랑스 프레타 포르테, 이탈리아 최고의 밀라노컬렉션, 중동 왕실 아랍에미리트 진출, 중국 상해 패션쇼 개최 등 세계 패션계의 최정상에서 한류를 만들려 노력해 온 그의 철저하고도 완벽주의적인 예술혼은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최재희 사진제공 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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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로 시작하는 랑유 디자이너의 아틀리에 

강남 한복판의 사무실, 검은색 디자인의 다양한 의상들이 즐비해 있다. 하얀색 벽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련된 의상들 사이로 하이톤의 맑은 소리가 들려온다. 파스텔 계열의 예쁜 빛깔을 가진 새의 소리다. 열 마리가 훨씬 넘는 새들의 소리가 마치 합창 소리처럼 들린다. 사람의 말에 지쳐갈 무렵 새소리로 긴박하고 날이 선 정신을 내려놓는 것이리라. 새장 옆에 서서 새들을 바라보는 랑유 선생은 소녀 같은 미소로 새들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 순간 그 새들은 새가 아니라 랑유 선생의 친구이자 자식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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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하이패션협회에서 공식 초청한 아시아 최초의 디자이너, 아직도 그 명성은 그대로 남아있다.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이나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과 같은 세계적인 자이너 브랜드가 지금의 입지를 잡기 이전, 우리나라에는 토종 디자이너 ‘랑유’가 있었다. 

당시 루이뷔통에서는 여행용 캐리어가 출시되는 등 명품시장의 럭셔리한 이미지가 막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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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정상에서 화려한 시작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1년에 봄, 여름 두 번 새로운 의상을 발표해 세계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쇼인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중 알타모다 패션쇼(Alta Moda Collection)는 유럽 패션의 자존심이라 불린다. 

기성복 중심의 프레타 포르테(pr êt-à-porter) 패션쇼에 영감을 주는 그야말로 하이패션(High fashion)의 향연장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분홍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로마 스페인 광장을 무대 삼아 자연과 더불어 펼쳐지는 인류 최고의 패션쇼, 신이 창조한 대자연의 캔버스 위에 인간이 창조한 디자인의 향연,한 광경에 숨이 막힐 수밖에 없는 그 무대에서 극찬을 받은 디자이너가 바로 랑유 김정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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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하이패션협회의 공식초청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아직 아시아에서는 저밖에 없죠. 특히 로마 스페인 광장은 이탈리아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거의 자국의 디자이너만 씁니다.

룰을 처음으로 깬 사람이 저였어요. 1991년의 일이네요.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대표 적인 작품 1개씩만 골라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트레비 분수 돌계단을 세계 최정상의 모델들과 함께 내려오는 거죠. 하늘로 전자빔이 쏘아 올려지고 오케스트라가 있는 정말 대단한 패션쇼입니다.”

패션쇼 다음날 CNN에서는 ‘이탈리아 알타모다의 특별인물’이란 타이틀로 랑유의 인터뷰를 전 세계로 방영하였고, 중동 왕실로의 진출도 이때 성사 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이탈리아 하이패션협회 공식 초청으로 프론타 모다 밀라노 컬렉션을 참가했으며 한국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 엑스포 공식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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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제산업계에서도 그의 디자인 능력을 인정 받아 삼성그룹, 한솔제지, 우방기업의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한, 랑유는 한국을 대표하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의상을 협찬하는 등 연예인의 의상협찬을 해왔고 미스코리아대회 심사위원 및 각종 국제 미인대회에 드레스를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또 모스크바 청년 대궁전에서 열린 한·소 수교 1주년 기념 패션쇼를 개최했고 중국과 미국에서도 활동해오며 한류 패션의 세계화와 세계 최정상의 브랜드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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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골드클래스 패션위크 패션쇼, 오페라 박쥐 세종문화회관 패션쇼, 아시아모델어워즈 패션쇼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사단법인 한국블록체인기업진흥협회와의 협업으로 양재동 더케이호텔에서 NFT사업화를 위한 패션쇼를 선보였다. 또 프랑스 파리 패션쇼를 비롯해 중국미용협회의 초청으로 상하이에서 ‘SELECTION OF ASIA’를 타이틀로 국제적 규모의 패션쇼를 치러내기도 했으며 그간 한류 패션의 세계화 노력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끊임없는 열정으로 다시 일어서는 맨발의 디자이너

랑유의 신화적인 패션계의 기록들은 단순히 운으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91년도 당시 40대 초반의 나이로 이탈리아 알타모타쇼를 준비하는 와중에 운송상의 문제로 의상이 배송되지 못했을 때 그 쇼의 주최 측인 세계 최정상의 모델에이전시 3곳 모두에서 의상 없이 모델들을 무대에 세울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랑유는 그들에게 눈물로 통사정을 하고 모델과 디자이너 모두 맨발로 무대를 서는 투혼 끝에 간신히 패션쇼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회사 건물 등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기까지 그의 인생은 극과 극을 오가는 롤러코스터였다. 그러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또 그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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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오는데 쉽지는 않았습니다. 디자이너가 사업을 뭘 알겠어요. 부도 소식을 듣고 나서 호텔 5층에서 바다가 보이는데 순간 마음이 약해지더군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또 우리 아이들이 있었죠. 그 상황을 해결하고자 할인 판매를 시작했을 때도 저를 돕겠다고 행사장으로 무리 지어서 와준 사람들, 의상 작품을 사면서 위로를 건네고 손잡아주던 많은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다시 힘을 내고 용기를 내게 된 것이죠. ‘랑유 선생님이 한국 활동하신다’라면서 진심으로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분들이 제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여행 한번 못해보고 일만 하고 살았다. 출산한 다음 날 출근했고 밀라노 출장을 갔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배가 불러서 만삭일 때도 부른 배를 붙잡고 ‘내 작품이니까 내가 해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땅에다 손을 짚고 일어설 정도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임했다. 그는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명장이 될 수 있었다고 회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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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 삶의 목적이자 전부

남녀 누구나 랑유의 작품을 입었을 때는 특별해진다. 

어디에 입고 나가든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그는 세계 최정상의 브랜드들 못지않은 디자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당시에는 나이트웨어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없었어요. 저는 자신이 있었죠. 저희가 쓰던 청담동의 트윈 건물 A관, B관에 나누어서 전시했는데 3일만 지나도 다 팔리고 옷이 절반도 안 남았었죠.

가격도 상당했는데 당시 7개의 방송프로그램에 의상협찬이 들어가던 때라 그랬는지 TV 드라마에 나온 랑유 나이트웨어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자존감을 높여주었던 일인 것 같았죠. 허리가 맞지 않는데도 고쳐서 입겠다고 사가는 사람도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고객이 만족하는 패션을 창조해내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죠.”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옷을 어떻게 입느냐는 곧 자기표현인데 좀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디자인하되 입으면 편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쉼이 없어야 한단다. 그래서 랑유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어디서나 특채가 되고 인정받는 실력가가 된다고 한다. 또 고객들에게 의상을 새로 만들어서 입혔을 때 만족한다는 반응이 올 때 디자이너로서 가장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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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가 된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패션디자이너로 살고 싶어요. 디자인이라는 영역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얼마 전 저를 찾아온 고객 중에 30년 전에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오신 분이 계셨는데 아직도 새 옷 같다며 중요한 자리에 입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오로지 세계 최정상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세계 패션계를 밝혀줄 별 중의 별 

‘클래식하고, 여성적이고, 모던하고, 시크하다’ 랑유 스스로 자신의 디자인에 내린 표현이다. 패션에 있어서 폭넓은 견해를 가진 그는 미국의 주택 정원을 디자인해서 호평을 받기도 한 종합 예술가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가 다 패션이라고 볼 수 있단다. 

이제는 고객의 눈만 쳐다봐도 사이즈가 정확히 판단될 정도로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운 내공을 가진 패션장인 랑유. 

71세 나이에 프랑스로 돌아와 ‘샤넬’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든 ‘코코 샤넬’을 좋아하는 그는 샤넬 못지않은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랑유’브랜드의 비상을 위한 대형프로젝트들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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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24년 한국·카타르 수교 50주년을 맞아 카타르 도하에 있는 문화마을에 위치한 초현대식 건축물인 ‘아트센터’에서 2024년 4월에 열리는‘한국의 날 기념축제’에서 하이라이트로 랑유의 패션쇼가 선보일 예정이다. 그간 중동에서의 경제교류의 성과에 이어서 ‘패션’을 필두로 한 문화교류의 구심점으로 랑유의 패션쇼가 그 진가를 발휘할 예정이라고 한다. 패션계의 최정상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만들어왔던 그의 새로운 도전과 열정들이 샤넬의 역사를 뛰어넘는 신화창조로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 별 중의 별이 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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