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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서라면 두려울게 없었던 청년 독립운동가 -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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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서라면 두려울게 없었던 청년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유독 애국심이 남달랐다. 리더십 또한 뛰어났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과감히 거부하고 농촌 계몽운동에 힘썼으며 부흥원을 건립해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상해로 넘어가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우리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도시락 폭탄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 의사. 그는 1932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 누구보다 짧았지만, 그의 일생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글 김현보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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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 배우며 애국심 쌓고
문맹퇴치운동에 뜻을 두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마을 안에 있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빼앗기면서 온 국민이 암울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윤봉길 의사는 자신처럼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길 바랐던 아버지와는 달리 유독 교육에 강한 뜻이 있었던 어머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릴 적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일제통치하에 일본어와 일본 교육을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점에 크게 분노를 표하던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3.1운동이 시작됐다. 일본의 행태에 참을 수 없는 격분을 느끼고 학교를 자퇴하며 매곡 성주록 선생이 운영하던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에 들어 간다. 그곳에서 한학을 배우며 애국심을 점점 쌓아가기 시작했 고 인격도 올바르게 형성하기 시작함과 더불어 300여 편의 시를 썼다.

그의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것은 바로 묘표 사건이다. 공부하다 잠깐 산책을 나온 그가 묘표를 한아름 안고 산에서 내려오는 청년과 마주쳤다. 혹시 글을 아냐며 이중 자신의 아버지 묘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윤봉길 의사 덕분에 자신의 아버지 묘표는 찾았지만, 모조리 뽑아온 길 잃은 다른 이들의 묘표는 어찌하라는 말인가. 배우지 못함이 결국 나라를 잃게 했다고 생각한 그는 문맹퇴치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농민운동 중 일제 탄압받다
독립운동가들 찾아 상해로

19세 되던 해 그의 스승 성주록 선생은 말했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출중한 스승을 찾아 떠나라.”
선생의 말에 따라 그해 오치서숙에서 나와 자신의 사랑방에 야학당을 차렸다. 그는 야학당을 운영하면서도 틈틈이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여기에 수록된 ‘세움내움’ 이라는 사상은 아직도 학생들에게 큰 본보기로 사용되고 있다.

1928년, 마을 유지 윤주봉의 도움으로 부흥원을 건립했다. 이는 마을회관이자 농민회관으로도 쓰였다. 1929년 부흥원 건립 1주년 기념 학예회에서 의사 윤봉길은 일본군의 감시를 받기 시작한다. 힘없는 토끼의 먹이를 다 가로채는 악랄한 여우의 이야기인 토끼와 여우라는 이솝우화를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에 빗대었고 이를 눈치챈 일본군에 의해 주재소에 가서 조사까지 받게 된다.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밀 목적을 가진 단체인 ‘월진회’를 창립했지만,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 무렵 부흥원을 건립할 당시 연을 맺었던 기자 이흑룡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망명을 결심한다. 망명의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긴 형사가 몇 번의 심문 끝에 선천경찰서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후 사촌 동생 신득의 도움을 받아 이흑룡을 다시 만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떠난다. 청도에서 잠깐 머물다 1931년 5월 8일, 드디어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는 상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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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커우공원 기념식장 무대 위로
물병 폭탄을 던지다

상해에 도착하고 약 2개월간 임시정부와 그 주변을 살펴본다. 그는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이념 다툼 등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임시정부에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와중에 7월 2일에는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수로 문제로 인한 작은 다툼이 발생했다. 바로 ‘만보산 사건’이다.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큰 싸움으로 번졌다. 일본군이 중간에서 이간질해 중국인은 한국인을, 한국인은 중국인을 서로 인정사정없이 죽이게 되었고 반한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켜졌다.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이 점점 확대되면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일어나고 세계의 관심은 상해로 쏠리게 되었다.

지금이 곧 혁명을 일으킬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윤봉길 의사는 미국으로 혁 명사를 공부하러 유학 갈 계획을 포기하고 일본인 거주지역인 홍커우로 옮겨 야채상으로 위장,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상해사변 승리 기념식을 개최한다는 기사를 접하 고 바로 김구를 찾아갔다. 이때 폭탄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왕의 생일이자 기념식이 열린 그 날 오전 홍커우공원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양복과 스프링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있던 윤봉길은 그들의 경비망을 뚫고 단상 가까이에 다가가 행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경 기념식 단상 위에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 상하이총영사 무라이 등이 도열 했다. 식순에 따라 무라이 총영사의 축사에 이어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제창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윤봉길은 그 노래가 끝나기 직전 수통형 폭탄의 마개를 열고 안전핀을 뽑은 후 단상 위에 집어 던졌다.
본래 도시락 폭탄과 물병 폭탄 두 개를 던지기 쉽게 보자기에 안전핀을 뽑을 구멍까지 내서 준비했지만, 주변을 에워싼 삼엄한 경계 때문에 던지기 쉬운 수통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고국이 아닌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괘씸한 일본군의 심보에 육군 묘지 관리사무소와 바로 옆 쓰레기처리장 사이에 있는 좁은 통로에 암매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는 광복 후 무려 14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사에 자원한 윤봉길 의사가 그해 4월 26일 선서한 내용은 애국과 독립 운동에 남다른 우리 국민의 가슴속을 여전히 뜨겁게 만들어준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 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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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VIEW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주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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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손수건, 시계 본 후 삼촌 독립운동정신 알았죠”

​‘의사 윤봉길’ 뒤엔 어머니 김원상 여사가 있었다
“아버지가 보관해오던 삼촌의 유품을 보고 호기심에 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 친구들에게 자랑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봤습니다. 피 묻은 손수건, 시계, 일본 돈을 보고 이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조카이자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주 부회장은 어린 시절을 기억을 이렇게 살려냈다. 대학을 입학했던 1966년부터 윤 부회장은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들은 삼촌 윤봉길 의사에 대한 일화를 다시 들어보면 성품이 매우 급했단다. ‘넓을’이라는 말을 ‘널브’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끈기와 인내력, 책임감이 대단했다. 과제를 내주면 밤을 새워서라도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는 그는 매우 활발하여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체격도 크고 힘이 세며 승부욕이 남달라 야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일쑤였다. 마을 사람들이 흡사 살쾡이 같다고 해서 ‘살가지’라 불렀다.

오치서숙을 다녔을 때도 접장 노릇을 하며 친구들을 대신해 대표로 야단을 맞기도 했다. 맞을 때도 한번 변명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구사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했어요. 할머니가 ‘용을 방불케 할 만큼 길이가 한 발이 넘는 우람한 구렁이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요.

태몽부터 심상치 않았던 거죠.”
일본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거부하여 오치서숙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1년 정도 혼자 일본어를 독학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과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고.
윤봉길 의사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그를 가르치고 보살폈다고 한다. 칭찬과 꾸짖음을 적절히 조절하여 언제나 그를 배려하며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사랑이 그가 용맹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셈이다.


“백범 김구 선생 뒤에는 곽낙원 여사가 있고, 안중근 의사 뒤에는 조마리아 여사가 있죠. 윤봉길 의사 뒤에는 김원상 여사가 있었어요. 동네 3.1운동을 주동하던 최정구를 쫓아다니며 시위에 참여하는 당돌하고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윤 의사가 보통학교를 자퇴한다고 선언했을 때도 모친은 아들을 말리기는 커녕 그 의 의사를 존중해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지지해 줬다. 그가 비로소 위대한 인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그에게 가장 큰 격려 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사람, 바로 그의 어머니인 김원상 여사 덕분이다.

매헌이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 아닌
물병 폭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줄 알고 있지만 사실 매헌 윤 의사가 던진 건 물병 폭탄이었어요. 도시락 폭탄도 준비해갔지만, 일본군의 빠른 제압으로 미처 던지지 못했죠.” 홍커우공원에서 이루어진 상해사변 승리를 축하 하는 기념식에 매점 설치를 금하기 때문에 참석자 들에게 물병과 도시락 그리고 일본 국기를 하나 씩 챙겨오라는 소식에 즉시 김구를 찾아가 폭탄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하루 전에는 미리 현장에 답사를 다녀오는 치밀하고 꼼꼼한 모습도 보였다. 당일 아침, 김구와 함께 태연하게 식사를 마치고 낡은 김구의 회중시계를 자신의 회중시계와 맞 바꿨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 회중시계는 필수품 이었어요.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 었죠.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을 암시해 낡아 보이는 김구의 시계를 스위스산인 본인의 시계와 바꾸 자고 제안했죠.”
남자답고 대범하지만 섬세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갖췄던 윤봉길 의사. 이 시계는 훗날 백범 김구 선생이 자신의 유품으로 남길 정도로 애지중 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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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학형,수통형폭탄>


“사실 그날 백정기 의사도 의거를 준비했었어요. 하지만 중국 정치 건달에게 속아 입장권을 구하지 못했죠. 윤봉길 의사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신사다운 옷차림과 유창한 일본말로 중국인 문지기를 속여 기념식에 입장할 수 있었어요.”
만약 백정기 의사까지 입장했다면 양쪽에서 폭탄이 휘날려 많은 일본 순사들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미리 두 개의 폭탄 보자기에 구멍을 내어 쉽게 폭탄을 터뜨릴 수 있도록 준비한 그는 주변의 동태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인 만여 명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무대에 무턱대고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는 쉽지 않았을 터. 그리하며 아침 9시 부터 11시가 넘을 때까지 적절한 시기를 노리며 잠시 빗방울이 비쳤을 때 우왕좌왕하는 일본군 사이를 뛰어 들어가 도시락보다 가벼운 물통 폭탄을 먼저 던진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무대 중앙에 명중시켰다.

양재동에 있는 ‘시민의 숲’ 명칭이 ‘윤봉길 공원’으로 바뀌길 소망한다
“윤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할 때 구금되었던 선천경찰서를 한번 가보고 싶어요. 윤 의사의 발자취가 묻어있 던 곳은 다 가봤는데 딱 거기만 아직 못 가봤거든요.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던 시절 공개연설로 윤봉길 의사의 유가족을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아쉽 게도 가보지 못했어요.”
가볼 수만 있다면 윤 의사가 구금되었던 선천경찰서 앞에 작은 빗돌이라도 세우고 싶은 심정이다. 중국 상해에 루신공원이 있다. 원래는 홍커우공원이었으나 중국 최고의 문학가이자 영웅으로 칭송받는 루신의 이름으로 변경하였으며, 고맙게도 중국인들이 그를 잊지 않고 그 공원 한 귀퉁이에 이곳에서 거사한 매헌 윤봉길 기념관을 만들어 함께 기린다.

더군다나 적이었 던 일본에도 제일 큰 윤 의사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2022년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 부회장은 90주년 기념사업으로 양재 시민 의 숲을 윤봉길 공원으로 바꿀 수 있게 추진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로 인해 일본군들이 집안을 풍비박산 내며 수색했을 때에도 끝까지 아들을 두둔하며 매년 상해 의거일에 맞춰 윤 의사 생일상을 차려준 그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의 비석을 하나 세워주고 싶단다.

“마지막으로 양재동에 있는 시민의 숲이라는 명칭이 윤봉길 공원으로 바뀌는게 저의 소망입니다. 사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윤봉길 공원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도로명 주소가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 온 매헌로입니다. 이곳이 나라 사랑의 장으로 활용되 길 바라요”
부천에 ‘중동공원’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들어섰고 이에 자랑스러움을 느낀 시민들은 동네 이름이 중동임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하여 지금은 안중근 공원이 되 었다. 이곳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것이다. 위대 하며 강인한 정신이 깃든 윤봉길 공원을 만나볼 수 있 길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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