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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선생 "영웅, 지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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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지혜를 말하다  

       보재 이상설 선생


‘돌아오지 않는 특사’가 있다. 일제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 기자 고종은 대한민국의 사정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 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3명으로 구성된 헤이그 특사 가 그들이다. 일본에 발각되어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길로 멈추지 않고 보재 이상설 선생은 유럽과 러시아 를 무대로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한 몸을 다 바쳤다. 그의 강한 독립 의지와 애국정신이 재 평가되고 있는 이유다.

글 최진희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사진제공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한국의 독립 의지 전 세계에 알린 외교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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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의 독립에 앞장서다

불꽃처럼 살다간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비상했던 그는 25세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갑 오문과에 급제, 27세 나이에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교수이자 초대 관장까지 지내며, 한성사 범학교의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 여러 차례 관직에 몸담았다.

이상설 선생의 애국의식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젊 은 독립지사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 나가면서부터 다. 상동교회는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등 열혈 애국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곳에는 이상설, 이동녕, 주시경, 이동휘, 이준, 이회영, 이시영, 김구 등 구한말 애국지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 중 전 재 산을 자주독립을 위해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과는 담 하나 사이에 둔 이웃으로 서로 형제처럼 지낸 사이다.

상동교회 다락방에 모여 애국의식이 점차 고 조될 무렵인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 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 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 선생은 황제 인준을 거 치지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종로한복판에서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 광경을 목도 한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 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울부짖었다”라고 썼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 1906년 언제 돌아올지 모를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그가 정착한 곳은 북 간도 용정촌(현재 용정시)이었고, 그곳에 근대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瑞 甸書塾)’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을 용정촌에 설립한 것은 향후 해외 독립운 동기지 건설의 초석이자 헤이그 특사 파견의 철저한 사전 계획이었을 것으 로 여러 문헌을 통해 해석되고 있다. 또 훗날 민족운동 인재를 양성해낸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방향 역시 서전서숙을 따랐다는 사실은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등 설립자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 외교의 주역이 되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여러 관직에 있을 당시 다양한 서양 근대문학과 신학 문을 독학으로 통달했다. 특히 영어에 능통했던 그에게 고종은 1907년 네 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의 부 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라는 임무를 전했다.

고종의 밀서를 받은 이준 열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와 이상설 선생과 합류했고, 다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하면서 세 특 사의 진용을 갖췄다. 이후 베를린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두 달이 걸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이미 손을 써 놓은 일본의 방해와 국제 사회의 외면으로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결국, 세 특사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관인 사칭죄를 물어 이상설 선생은 사형에, 이준과 이위용 선생은 각각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준 선생은 억울함을 토로하며 헤이그에서 순국했고, 이상설, 이위종 선생은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 독립운 동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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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로서의 소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외신들에 큰 주목을 받아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귀빈 자격으로 초청을 받게 됐고, 이위종 선생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발표, 한 국이 처한 상황을 외신들과 각국 대표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 가 됐다.
1910년 경술국치 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이상설 선생 은 조국 독립운동을 새 국면으로 전개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 합 직후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을 비롯해 이범윤, 김 학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 ‘성명회’를 결성했고, 1911년 이동 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이주한인 자치를 만들 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권업회’를 조직했다.

또 1914년에는 해외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 립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상설 선생은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으로 추대되어 독립전쟁 준비에 앞장섰으나 일본 에 요주 인물로 표적이 되어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니콜리스크 우 수리스크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게 됐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915년 상해로 넘어가 박은식, 신규식 등 독립지사들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06년 망명길에 올랐던 이상설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10 년간 몸을 불사르며 헌신했다. 신한혁명당을 결성할 무렵에는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투병을 시작했고, 1917년 4월 1일 조국으 로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순국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보재 이상설 선생이 권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할 당시 일제에 요주 인물로 낙인찍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무렵 지은 ‘삼읍 (三泣)’이라는 시가 있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

이시를 읽자니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때의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INTERVIEW"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이연우 회장(권한대행)
       “숙원사업인 기념관 건립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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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의 설립 목적과 주요 활동이 궁금하다.
A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평가가 미흡했던 보 재 이상설 선생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 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연구하고 자료 수집 에 앞장서 올바른 평가와 재조명을 위해 1971년 사단법인이 발족됐다. 초기에는 보재 선생의 본관 인 경주이씨 종친을 중심으로 생가 보전과 선생의 넋을 모신 숭열사에서 추모제 행사 등 선생이 태 어난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2015년 이후 해외 등 각계에서 보재 선생의 애국정신과 독립운 동의 뜻을 널리 선양해야 한다는 견해와 함께 역 사바로알기범국민운동, 기념관 건립사업 등이 추 진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Q 보재 선생의 활약상 비해 자료가 많이 남아 있 지 않은 이유가 있나?
A 선생은 일본 헌병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 던 자신으로 인해 동료들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서 거하면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라 는 유언을 남겼다.

그 뜻에 따라 유품들을 불태우고 유골을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펀 강가에 뿌려졌다. 현재 그곳에 보재 선생의 생애 활동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Q 다행히도 기념사업회에서는 보재 선생 관련 자료를 상당 히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A 이상설 선생 서거 100주기 즈음하여 보재 선생의 항일독립 운동과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KBS 청 주방송국에서 〈보재 이상설 선생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전 국에 방영되고,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이 확정되면서 자료 수집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마침 근대다큐멘터리 제작사인 더채널의 김광만 PD가 2016년~2018년까지 유럽, 러시아, 중국, 미국 등 각국의 문서보관소를 돌며 보재 선생의 소중 한 자료를 대거 확보했다.

지난 2017년에는 미국 국립문서보 관소(NARA)에서 보재 선생 주도로 1910년 세계에 독립 의 지를 천명했던 ‘성명회 선언문’ 원본을 107년 만에 발견했다. 기록과 입소문으로만 전해졌던 선언서의 실제 모습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며 큰 화제가 됐다. 이 선언서는 일제강점기 최 대 규모인 8,624명이 서명해 ‘3·1 독립선언서’급 가치를 지닌 다고 학계는 평가한다.

지난 2018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배후를 캐면 이상설 선생과 사상 적 교류한 대목이 나온다는 단서가 일본헌병대 사령관 의 비밀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Q 한흥동 이상설 항일투쟁 유지 기념비 건립 앞두고 불편한 일이 있었다던데.
A 헤이그 특사 좌절 이후 보재 선생은 연해주 밀산에 최초의 항일무장투쟁 운동기지 ‘한흥동’을 건설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을 배출했던 독립군 기지가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2017년 9월 우리 기념사업회에 서는 이상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 는 기념비 제막식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의 사드 (THAAD) 추가 배치를 문제 삼아 제막식 1주일 전 중 국 정부로부터 공사 중단 통보를 받았다. 참으로 아연 실색할 일이었는데, 당시 KBS 특파원을 통해 KBS 9 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Q 학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도 위대하다고 들었다.

A 보재 선생이 1899년 완성한 수학서 〈수리(數理)〉는 우리나라 근대수학의 효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재평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삼각함수 공식은 물론이 고 피타고라스 정리와

2차 방정식이 등장하고, 조선의 수학 그 어디에도 없는 현대적 기호와 부호들이 등장 한다.

수학 전문가들조차도 당시 이 정도의 수학서를 집필한 것은 천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1900년에는 최초의 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산술신 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수학서 외에도 물리학 전문서 적인 ’백승호초(百勝胡草)‘를 비롯해 화학 서적 ’화학계 몽초(化學啓蒙抄)‘, 식물학 서적 ‘식물학’ 등 다양한 실학 분야의 서적을 남겼다.

Q 기념관 건립’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궁금하다.
A 지난해 착공식을 마친 기념관 건립(충북 위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건축이 완공되면 기념관 내에 수집한 자료 들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지 차근히 모색 중이다. 기념 관 건립과 함께 우리 기념사업회에서 시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한흥동 기념비’와 ‘서전서숙 옛터’,

그리고 1910년 성명회 선언서가 탄생한 이상설 선생 거주 지(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근) 등 3곳을 해외 국가 현 충 시설로 지정해줄 것을 국가보훈처에 제안했다. 이 외에도 우수리스크 강가에 있는 보재 선생의 유허 비를 재정비하고 동상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헤이그 특사들의 이동 경로와 이상설 선생이 거쳐 간 유적지를 역사 탐방로로 만드는 사업 등이 앞으로 해야 할 일 들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를 기리는 사업에 정부의 적극적인 보훈정책과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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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우 회장(권한대행)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홍보대사, 대한스포츠마케팅연구원 대표,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관리위원회 <방송토론위 원회> 위원, 공주대학교 객원교수로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 재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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