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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그룹 글로벌경영 정영수 고문 "원칙과 기본으로 무장한 성공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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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과 기본으로 무장한 성공신화"  

      CJ그룹 글로벌경영 정영수 고문


딱 봐도 ‘상남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 청년과 대적할 만한 강인한 정신력으로 약속 시간 10분 전부터 미리 인터뷰 준비를 하는 CJ그룹 글로벌경영의 정영수 고문. “졸면 죽는다”라는 좌우명으로 세계에서 기업생존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싱가포르에 진출하여 1억 달러 수출액을 기록한 ‘멋진 촌놈’(자칭). 숱한 고비를 넘어오며 이뤄온 그의 신화는 원칙주의와 애국심에서 비롯됐다. 그가 가진 어떤 타이들로도 그의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멋진 선 배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손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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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사나이, 진맥스(JINMAX)로 세계를 제패하다 

“뭐하러 왔어요. 한 것도 없는데…” 

CJ인재원에서 마주한 정영수 고문의 첫 포문은 상당히 직선적이었다. 그를 설명하는 현재 직책 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고 그 면면이 모두 전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대단한 인물인 그가 던지는 소탈한 말투는 묘하게 긴장감을 조성하면서도 근원 모를 친숙함이 묻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오래 있지 못해요. 제조판매를 하다 보니 전 세계를 돌아다녀요. 곧 싱가포르로 들어 가야 합니다. CJ 고문으로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장이 직접 움직이기 힘들 때도 있어서 제가 대신해서 갈 때가 많이 있어요.” 역시나 친근한 어조로 급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먼저 이야기해준다. 거의 45년을 해외에서 보냈기에 이제는 사투리를 잊어버릴 때도 되었지만 그의 말에서는 진한 경상도 사나이의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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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해외 진출의 산증인인 정 고문. ㈜한국마벨의 홍콩 주재원으로 5년을 보내고 싱가포르 법인장으로 3년 더 근무한 뒤 39살에 싱가포르에서 ㈜진맥스(JINMAX)를 창업했다. 진맥스는 진주 사나이(JINJU)가 큰 꿈을 펼쳐내겠다(MAXIMIZE)는 뜻이 있다고 한다. 고향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그의 투철한 사명감은 곧 사업의 성과로 이어졌다. 생면부지 의 땅에서 맨손으로 한국기업의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를 전 세계로 판매해 1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지구를 150바퀴 돌았다는 그의 열정은‘진맥스’를 괄목할만한 기업으로 키워냈고‘진주’는 그와 함께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고향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진심은 2021년 진주시민상 수상이라는 영예로 이어졌지만, 여전히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내가 받으면 안 되는데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할 수 없이 받았어요. 진주 사람한테는 ‘진주시민상’을 받는 것이 제일 영광입니다.”

 

내 조국을 사랑하고 내 나라가 먼저인 교육철학 

상사 주재원이었으니 자녀들은 아버지를 따라 해외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한다. 하지만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말을 쓰도록 교육했다. 밖에 나가면 영어로, 중국어로 소통해야 했지만 다행히 자녀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딸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그 다음 날 한국으로 불러들여서 대학입시 공부를 시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할 정도로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교육은 투철했다.

다행히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은 모두 다 사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꾼으로 자리 잡았다. 맏딸은 싱가포르 국영방송인 CNA(Channel News Asia)의 간판 앵커로 활약했고, 둘째 딸은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인 셋째는 CJ그룹 미주본부장을 맡고 있다. 

특히 딸이 둘인 그는 딸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외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 여자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애들이 대학 가고 다 커버리면 여자들이 참 외롭게 살더라고요. 사실 여자들은 자식 때문에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랑이 식었다기보다는 외국인인 남편은 아무래도 나이 들면 자기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거든요. 취미가 같고 문화가 같으니까요. 그러나 한국 부인들은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보니 외로울 수밖에 없죠. 딸들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바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바람처럼 그의 자녀들은 한국사회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잘 아는 한국인으로 성장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벌써 다 결혼을 해서 손자도 7명인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큰 부자라고 이야기한다. 자식들이 잘되어서 건강한 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행복하게 웃으며 살 수 있는 것, 이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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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동포사회와 현지 경제인들이 인정한 대표 한국인  

그는 본래 의협심이 강했다고 한다. 45세가 되던 1993년 1월, 그는 제5대 싱가포르 한인회 의 수장이 되어 "졸면 죽는다. 사업은 봉사다.”라는 표어를 가슴에 새기고 사업과 한인회 봉사에 열심히 매진했다. 회장으로 재임 시 최초의 소식지인‘한누리’라는 한인회보를 계간으로 만들어 동포들 간의 소통 창구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100호를 넘어가고 있다고 한다. 또 'Tanjong Pagar’에 한인회관을 건립한 것도 8년간 한인회장을 하면서 그가 만들어 낸 업적 중 하나이다. 매주 토요일에 한글만 가르치던 주말학교를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진행해 ‘Lim Ah Woo Road’에 단독주택을 구입해 1993년 3월 3일 정식으로 개교를 한 일도 그가 기억하는 한인회장으로서의 보람이다. 

그리고 지금 그 한국 학교는 'Butik Tingi’로 부지를 옮겨 중·고 등학교 과정을 신설한 개교 20주년을 맞는 명실 상부 종합 국제학교로 성장하였다. 

그 후 그는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 소장이 되어 이름뿐이던 상공회의소가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혈맥을 돌려 400여 곳이 넘는 회원사를 만들기도 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타지에서 오롯이 의지 하나만으로 남들은 따라오지 못할 엄청 난 성과를 만들어 내는 신출한 그의 능력은 싱가포르 현지 사회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싱가포르 국제상공회의소 (SICC : Singapore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는데 이는 175년 SICC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또 2008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17,000개 이상의 회원사를 두고 있는 싱가포르기업연합회(SBF : Singapore Business Federation)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대외협력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전문경제인으로서의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해 차세대 동포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의 상임고문으로도 열정을 바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면 물가도 비싸고 경비도 많이 들어 98%가 실패하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특히 자동차는 세계에서 제일 비쌉니다. 2~3년 만에 자금을 다 쓰고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인데 저는 다행히 2%에 속해서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저 혼자 잘해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봉사 하고 배려하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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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성공을 만든다  

“제 책의 첫 번째 장은 제 고향인 진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장이 저희 집 가훈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수학여행을 안 보내셨을 정도로 엄하게 자식들을 키우셨었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체계적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그는 철저히 계획을 세우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다. 1일 계획에서 시작해서 3일, 7일, 15일, 한 달, 6개월, 1년 계획, 그리고 3년, 5년, 10년, 20년 계획까지 꼼꼼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체크해가며 계획들을 점검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스스로 세운 계획의 90%를 달성했다고 한다. 

“평생을 자명종 없이 살아요. 4시에 일어나야겠다 하면 정확히 4시에 눈이 떠집니다. 남보다 늦게 간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정 회장님과 약속하면 15분 전에 나가야 한다고 이야길 합니다. 내 시간이 중요하면 남의 시간도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저보다 1살이라도 많으면 무조건 선배 대접을 깍듯이 합니다. 

하지만 1살이라도 적으면 후배 대접을 또 잘해줍니다. 선배는 먼저 경험 한 사람으로서 후배를 가르칠 의무와 권리가 있으니까요.” 

후배들 사이에서 정확하지만 닮고 싶은 선배로 통하는 그는 상상을 통해서 계획이 세워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획을 세워놓고 반드시 실행할 것을 강조한다.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대학교 1학년 때 꿈은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다고 회상한다. 대학 시절, 1년에 5%씩 스스로 성장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20년 후 에는 100% 성장하여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으로 달려왔단다. 그렇게 해서 진출한 해외사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 원동력이 바로 계획이고, 또 실천이라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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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으로 출근해서 꼴등으로 퇴근하며 별과 함께 청춘을 보냈습니다.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했으니까요.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남보다 부지런히 또 열심히 해야 살아남습니다. 제 좌우명이‘지식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Knowledge more than others) 노력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Afford more than others), 기대는 다른 사람보다 작게(Expect less than others)’입니다. 제가 강의하는 첫머리에 나오는 표현인데 평생 이것을 지키면서 살 아오고 있습니다.”  


한류 꿈꾸는 겸손하지만 ‘멋진 촌놈’ 

“제가 해외로 진출했을 때는 우리나라에 해외로 내다 팔 물건이 없었습니다. 지렁이 팔고, 가발 팔고 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전체 수출 100억 불이 안 되었죠. 북한보다 못살았고 필리핀에 원조를 받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무역 7위의 1조 달러 경제 규모를 가진 세계 11위의 선진국이 된 것이죠.” 

싱가포르는 국민소득 6만 불을 달성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지만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 한다고 한다. 또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BTS, 김연아, 손흥민, 백건우, 조수미,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 대한민국은 정말로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호응도가 높은 나라로 발돋움했다. 그는 이럴 때일 수록 더욱 겸손하게 옛 시절을 생각하며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이솝우화의 수탉 이야기를 꺼내며 “싸움에서 이겼다고 소등에 올라 타 환호성을 지르다 독수리의 먹잇감이 된 수탉이 될 필요는 없다”며 존경심이 질투심으로 변해가지 않게 스스로를 낮추고 교만하지 않게 마음을 다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어조에서 단호함과 걱정이 스친다. 실제로 싱가포르 언론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 예를 들어 아이돌 스타의 약물 복용이라든지 이혼 기사, 혹은 사고를 다루는 식의 기사들이 주류로 다루어지는 상황들은 이런 그의 걱정을 반영한 듯하다.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국가가 되고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지원해야 합니다. 특히 차세대 재외동포와 국내의 차세대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지원해줘서 젊은 사람들이 기회를 더 많이 얻도록 해야 합니다.” 글로벌한상드림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재외동포 청년들의 자립을 돕는 장학사업과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국내 청년들의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청년 세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그는 앞으로 한류의 명맥을 이어갈 그들이 정신을 올바르게 가다듬고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여 글로벌 사회에서 주류세력이 되는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다. 

청춘의 시절, 열정과 신의, 성실로 사업을 성공 가도에 올려놓고 사회공헌과 봉사를 해온 그의 노고를 인정받아 1991년 무역의 날에는 수출포상, 2009년 세계한인의 날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2013년도에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베트남 문화훈장, 2017년도에는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주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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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자신만의 노하우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통해서 자신이 아직 건강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린다고 한다. 일종의 DJ 역할을 하면서 유쾌하고 행복하게 남은 시간을 보내는 그는 시인으로 활동하는 아내가 지어줬다는 그의 책 제목처럼 ‘멋진 촌놈’이 확실한 듯하다. 또 아내와 함께 그도 틈틈이 수필과 시 등을 집필하며 새롭게 입문하게 된 문학도로서 70대의 10년을 행복의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고 조심스레 포부를 밝힌다. 이미《밖으로 밖으로, 신나는 인생》과 연당 정영수 수필집 《70찻잔》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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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수 고문과의 만남에서 대한민국 보편적인 남성의 사고를 가진, 가부장적이지만 사람 냄새 나는 멋진 경상도 사나이의 열정과 애국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 대한민국을 일으켜왔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한 민국이 최정상에 오르는 날까지 겸손과 배려와 봉사를 강조하는 그의 철학이 있는 활동이 계속되길 기 대해 본다.  



+ + + 

정영수 고문은 경상남도 진주 출신으로 1977년 홍콩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첫 해외 근무를 시작, 1981년 상사 주재원 싱가포르 법인장, 1984년 ㈜JINMAX 창업, 1985년 싱가포르 한인회 부회장을 역임한 뒤 1993년 싱가포르 한인회장을 8년간 맡아서 운영했다. 같은 해에 싱가포르 평화통일자문회의 지회장으로 8년을 봉사했다. 싱가포르 한국학교 재단이사장, 아태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22개국),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을 거친 뒤 싱가포르 경제인연합회 국제담당위원회 부회장(2007), 세계한인무역협회 상임고문(2011~현재), CJ그룹 글로벌 경영고문(2009~), 글로벌 한상드림이사장(2020~), 세계한상대회리딩CEO포럼 공동의장(2021~), 세계한인언론인협회총재, 한미동맹재단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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