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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씨앗 되어 일군 재외한인동포 ‘홍익인간’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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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씨앗 되어 일군 재외한인동포

‘홍익인간’의 열매

반세기에 걸쳐 한인 해외 이주의 역사를 만들어 온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양창영 대표이사 겸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이하 세계한상총연합회)사무총장. 그는 우리나라가 OECD 기준 세계 9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원동력에는 해외로 나가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준 750만 재외한인 동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조국에 대한 애국심 하나로 그들이 이국 땅에서 흘린 땀과 눈물은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리는 씨앗이 되어 전 분야에 걸쳐 코리안파워(K-POWER)를 만드는데 기여 했다. 더 나아가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기반으로 번영도 일구어냈다. 암울했던 시절을 이겨 낸 재외동포 한인 이민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성을 보여준 본보기라고 힘주어 말하는 양창영 대표이사를 만나보았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김성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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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부터 해외 인력 진출사업추진 

(재)범흥이주공사, ㈜국제이주개발공사 설립 


지구촌 면적의 0.07%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은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참가하며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인구 5천만 명의 아시아에서도 작은 나라에 속하는 대한민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한 것이다. 70여 년 전 전쟁을 치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치부 받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기적’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번영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던 우리 재외한인동포들의 삶은 기적이 단순히 ‘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해낸 본보기다.


초창기 자의반 타의반 강제이주를 시작으로 시대적, 개인적 상황에 부응하여 전 세계로 진출했던 재외동포들은 현재 공식 통계로 지구촌 190개국에 7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중 약 200만 명(누적통계)을 해외로 진출시킨 양창영 전 국회의원은 한인 이민사에 도움을 준 개척자이자 산 증인이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인구는 2,500만 명. 정부에서는 산아제한과 동시에 해외 이주를 권장하기 위해 1962년 3월 9일, 법률 제 1030호로 ‘해외이주법’을 제정했다.

“원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해외 이민법을 만들었는데 인구가 너무 증가하니까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인구가 너무 많으니 한국 사람 좀 받아달라고 했는데 결렬이 되었어요. 1962년 11 월이었죠. 그러다 63년도에 케네디 대통령이 서거하고 린든 B. 존 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다시 박대통령이 제안을 했는데 또 결렬이 되었어요. 그리고 65년 4월에 존슨 대통령의 국빈방문 시 역시 박 대통령이 제안을 했지만 세 번째로 결렬됩니다. 그해 7월 제가 미국에 갔어요. 전 세계 50여 개국 학생들과 미국 의 30여개 도시를 3개월 간 돌아다니며 토론도 하고 산업시설도 돌아 보는 ‘세계청년학생총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것이었는데요. 그때 미국의 이민국적법이 개정되었어요. 필립 하트 상원 의원과 임마누엘 샐러 하원의원이 발의한 법안이기 때문에 ‘하트 앤 샐러 법안(Hart-Celler Act)’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그가 참여한 MRA/IC 세계대회 행사는 미국 목사 Frank N. Buchman이 1938년 주창한 인류만의 고유한 정신적, 도덕적 절대가치인 ‘정직, 순결, 무사, 사랑’의 규범을 실천하자는 운동, 즉 도덕재무장운동으로 열린 학생총회였다. 당시 1920년대에 제정된 이민국적법에는 유색인종은 미국으로 이민 올 수가 없었지만 1965년 10월 1일부로 개정된 이민 국적법을 시행하면서 국가별 쿼터제에 따라 유색인종의 이민이 허용됐다. 미국에서 이미 정착한 사람들을 위한 가정 재통합의 목적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바라는 사람들과 숙련된 노동자들을 받아들이자는 취지였다.

그 대회의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일본 지바 사브로 중의원 의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일본척식대학을 만들어 인재들을 해외로 진출시킨 데에 있었다”면서 “앞으로 한국도 교육받은 인재들이 해외로 나가야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국이 가난 한 것에 한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는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후 그 의 해외문화 경험을 높이 평가한 정부는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외인력 진출만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굳어진 상태였다. 그는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포기하고 최초의 민간주도 해외 이주회사인 (재)범흥(이주)공사, ㈜국제이주개발공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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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투쟁 위에 우뚝 선

불굴의 개척정신

당시 ‘해외개발공사’라는 이름으로 국가 주도의 해외이주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가 설립한 민간주도의 ‘(재)범흥(이주)공사(이하 범 흥공사)’가 거의 해외이주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해외로 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방송국에서 해외 취업, 해외이민 등 해외로 진출하는 상담 프로그램을 여러 해 동안 진행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서울시청 앞 태평 빌딩 내 사무실 앞에는 해외 이주 면담을 하려고 계단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선진국으로 150여 만 명, 특히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볼리비아,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중남미는 독점하다시피 해서 27만 명이 이주하고 정착하는데 기여 했다. 

파라과이 대통령과는 직접 소통하여 이민을 보낼 정도였고 안전한 해외 이주를 위해 사비를 들여 아마존을 헬리콥터로 답사하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삶의 터전을 바꾸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으로 생활을 그려나가다 보면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가 현재 까지 해외로 진출시킨 한인 이민자는 거의 200 만에 육박한다.


“영주권을 가지면 주립대학 같은 경우는 학비도 안들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가 있지만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허드렛일을 많이 했습니다.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하다가 걸레가 없으면 손바닥으로 닦아서 지문이 없어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의 힘든 삶을 위로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을 만나면 밥이나 술을 사주면 서 격려를 해주었고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해결해주었다. 그들 중엔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1860년대 강제이주시절부터 각 대륙으로 뻗어 나간 우리 재외동포들은 국내에서의 어려움 못지않은 고통을 감내해오며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한인동포사회의 신화를 개척해왔다, 일례로 1937년 9월 171,781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었는데 추위와 독충 등으로 인해 그해 7천 명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는 4천 8백명이 사망하는 슬픈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그 어떤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특유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한 창조성과 근면성으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왔다. 

몇 년 전 일본 아세아문제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가진 자산이 대한 민국 국가 예산의 25배라고 할 만큼 우리 동포들의 역량은 거대해졌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상공인으로 활동하는 한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는 그 상상을 초월한다. 원초적 생존투쟁에서 승리한 저력을 바탕에 깔고 1902년 공식적인 하와이로의 첫 이민을 시작으로 한 그 역사 속에는 각 나라마다 불굴의 정신과 근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위상을 일으켜 세워왔던 우리 재외한인동포사의 위인들이 존재 한다.

양창영 대표는 그들의 삶 속에서 힌트를 얻어 민족번영을 위해 전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임을 직감하고 많은 한국인을 세계로 진출시켰다. 그의 선견지명은 곧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었다.


2002년부터 재외동포재단 주관 

한상대회 개최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재외동포사의 영웅들은 각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주도 세력들을 키워오고 또 해당 국가 내 한인공동체에 힘을 실어오고 있다. 

‘시베리아의 난로’로 불렸던 연해주의 러시아 한상 최재형, 그는 군납 등 다양한 사업으로 러시아 거부로 성장하여 조국의 항일의병 활동을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시 군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재미동포 최초의 백만장자인 김종림은 1920년 임시 정부 비행대 창설의 주역이자 한국공군의 기원이 되는 ‘윌로우스 (willows) 한인 비행학교’를 탄생시켰다.

일본의 방적왕이라 불린 한상 서갑호는 일본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부로 성장해 모국의 섬유 산업을 견인했고, 안산 반월공단과 구로공단을 설립, 창원기계산업공단 투자유치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주일한국대사관 부지를 기증하여 재일 동포들의 위상을 곤곤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세계 각 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인적 자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 하기 위해 1993년, 일본에서 대단한 성과를 이룬 마루한 한창우 회장(세계한상총연합회장)을 선두로 김덕룡 의원 등과 더불어 ‘㈔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의 해외동포 조직 인 WZO(World Zionist Organization)와 중국의 화상, 인도 상인 이렇게 세계 3대 거상과 아일랜드, 이탈리아인들의 해외동포 조직 등을 살펴보고 필요성을 느껴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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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한상대회> 


“1993년 10월에 화상대회를 벤치마킹해서 한상대회를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매년 한상대회를 하다가 2002년부터는 재외동포재단의 주관 하에 한상대회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국내에서는 한상대회에 참여하도록 참여 독려를 하고 해외사업으로는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멕시코, 쿠바, 연변 등 한인들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그곳에서 한상지도자대회를 유치하는 등의 행사를 진행하여 본국과 한상이 해외에서 종횡으로 모임을 갖고 국내 경제에 뒷받침을 해주며 또 본국에서는 해외 활동 시 조국으로부터의 후원도 받을 수 있도록 상생할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해왔다.


  재외동포들 르네상스 시대 열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프로젝트 추진 중


제19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양창영 대표. 당시 그의 의원실에는 ‘재외동포 사랑방’이라는 액자를 걸었고 재외한인동포들에게 사랑과 우정을 베풀고 세세하게 배려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지구촌 재외동포한인 지도자들에게는 존경을 온전히 받았다. 현재는 세계한상총연합회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그의 의정 활동 영상 중 재외동포 문제를 전담하는 정부 기구 신설을 주장하는 내용과 재외동포 보호를 규정하는 법안이 없음을 질타하는 내용의 대정부질문 영상은 세계 각지의 한인회에서 주요행사 시 사전 영상으로 함께 시청하고 본 행사를 시작 할 정도로 그의 재외동포에 대한 진심과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헌법 2조 2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동포를 보호하는 의무를 진다’ 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우리 국회는 재외국민 보호를 규정하는 법안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헌법재판소는 2007년 6월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막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바 있습니다. 그 결과 2012년 19대 총선 때부터 재외국민투표가 이루어졌지만. 현지의 사정을 참작하지 못한 투표 방식으로 인해 투표율이 저조합니다.” 공관에만 투표소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공관까지 거리가 멀거나 거동이 불편한 재외국민의 경우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그는 재외동포 참정권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참정권 관련 사안으로 국회 앞에서 1 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열정과 소신으로 19대 국회를 지내온 국회의원으로서 재외동포 문제에 관한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 또 공감대를 형성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반세기가 넘게 재외동포 관련 일을 해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지구상 0.2%에 해당하는 인구로 전 세계 부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노벨경제학상의 3분의 1을 유대인들이 수상 했지만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더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을 접하기도 했고요. 이제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고 있는 시기가 도래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세계 곳곳에 나가 있는 우리 재외동포들의 경제적, 정신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즘 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된 인천에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 세계로 나가 있는 재외 동포들의 홈 타운이 되어주면서 대한민국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입지적 요소를 갖춘 영종도에 대단위 위락시설들을 갖춘 거점도시를 만들어 재외동포들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기틀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프로젝트는 나라 사랑이 깊은 그가 재외동포와 함께해 온 평생의 역작이면서 대한민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한인이주사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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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조감도>

 

지난 세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인류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살고자 노력해온 우리 재외 동포들과 함께 4차 산업혁명 시대, 새로운 미래를 여는 개척자가 되어 대한민국을 세계 최정상의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양창영 대표이사. 그의 열정은 오늘의 한국 청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로 뻗어 나가 무에서 유를 창출해온 위대한 재외한인동포들의 승리의 역사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야 할 우리 청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신이자 희망이다. 



양창영 대표이사

전)재단법인 범흥이주공사 사장 

전)국제이주개발공사 대표이사 

전)호서대학교 해외개발학과 교수 

전)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총장 

전)제19대 국회의원

현)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현)대한민국헌정회 해외동포위원장 

현)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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