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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아직 살아 있다. - 가수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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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아직 살아 있다.


역사는 시대가 만들고 대중가요는 그 시대를 품는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현대 가요사를 끌어안고 온 가 요계의 산증인 남진. 매끄러운 듯하면서도 구수한 정감에 남성적 힘이 스며든 그 목소리만으로도 더는 말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전설의 가수다. 특유의 담백한 말투와 진하게 풍기는 사람 냄새도 좋지만,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넓은 품 또한 그만의 전매 특허다. 그는 57년 노래 인생을 감사와 축복이 연속되는 기적 같은 과정이었다고 회상한다. 가수를 넘어 열정적인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여전히 노래가 목마르다.


글 이지영 기자 사진 김성헌 기자 사진제공 남진


한국 가요에 대한 애정,  그만의 가요 철학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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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고 그 위에 가수의 목소 리가 입혀지면 한 곡의 노래가 완성된다. 그 목 소리와 색깔은 듣는 사람에게 감성과 느낌을 전 달하고, 그것은 곧 감동이 되어 심장을 후벼판 다.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 속에 한 번씩은 노크 를 해봤음 직한 국민가수 남진의 목소리는 57 년이 지난 2021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매 끄러운 듯하면서 구수한 정감에 남성적 힘이 스 며들어 더욱 매력적이다.

귓전을 사로잡는 그의 목소리는 최근 MBN 〈인생 앨범 예스터데이,<보이스트롯>, KBS 〈트롯전국체전〉, SBS 〈트롯신이 떴다〉 등 여러 방송국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여전히 전성기를 증명해주고 있다.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하게 될 줄은 생 각도 못 했어요. 원래는 심사를 안 하는 게 출연 조건이었죠. 심사는 전문적인 기준이 있을 텐데 그런 공부를 안 해 봤어요. 오랜 경험을 통해서 느낌은 제대로 알 수 있죠. 세월이 흘러 이제는 심사까지 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어요.”

 1,000여 곡의 노래를 부르고 100여 장의 앨범을 발매한 대한민국 가요사의 산증인이 하는 말치고 는 겸손 그 자체다. 〈가슴 아프게〉, 〈님과 함께〉, 〈둥지〉, 〈내 영혼의 히로인〉, 〈빈잔〉, 〈나야 나〉 등 메가 히트곡만 나열하기에도 벅찬 남진이지만 그 에게서는 권위나 자만을 느낄 수가 없다. 방송에 서나 어디에서나 늘 솔직 담백하기만 하다.

 “트롯(trot)이라는 말 자체가 아쉬움이 있어요. 이 건 영어식 표현이거든요. 재즈, 스윙, 트위스트, 고고, 맘보처럼 그중 하나가 트롯이에요. 영어인 데 왜 우리나라 노래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우리나라는 민요, 시조, 창 이런 것들이 원 래 우리 음악입니다. 트롯의 원조는 프랑스예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가져가 서 리듬이 ‘쿵 짜작 쿵 짝’ 자기네들 노래하고 잘 맞으니까 ‘트롯’을 ‘엔카’라고 고친 겁니다. 왜 굳이 우리 가요를 트롯이라고 하는지 섭섭하더라고요. 그냥 ‘우리가요’라고 하면 되는데요.”
우리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다. 판소리를 가장 좋 아한다는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을 알고 들 어보지만, 우리의 창(판소리나 잡가 따위를 가락에 맞 춰 높은 소리로 부르는 노래)만큼 애절하고 절절한 감 성으로 표현하는 음악은 없다며 소름이 끼칠 정 도라고 말한다.


음악적 장르에 대한 구분도 이미 세계화된 시대 상황에 맞게 다양성과 자율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쪽이다. 남미, 유럽, 일본, 미국 각각 장르가 다 다르고 멜로디가 다양하지만, 요즘은 세계가 하 나가 되었고 장르 구분의 의미가 없어진 상황이다. 그 안에서 한국적인 것을 접목시키고 재생산 해내는 노하우를 그는 아주 명쾌하게 풀어낸다.

“열 곡을 열 사람이 부른다 치면 진짜 트롯 장르 를 부르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어요. 어느 장르, 어느 나라 노래든지 우리말을 붙이면 우리 것이 되는 거죠.


BTS가 부르는 노래가 한국적 노래인 것은 아니잖아요. 한국 사람이 부르니까 한국적 인 것이 되는 거죠. 노래도 그 세계가 무한대입니 다. 장르가 넓어졌고 전 세계의 음악을 스마트폰으로 다 보는 시대이잖아요.”
상상도 못할 실력과 재능을 가진 요즘 후배 가수 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소위 혁명적 학습기를 통해 서 음악적 장르와 한계를 뛰어넘는 기회를 만들 어내고 있다. 그것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라는 선 배 중의 선배, 남진! 우리 전통문화라는 반석에 후배들의 노력이 더해져서 전 세계적으로 음악적 감동을 주는 노래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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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년 만에 스타로 우뚝! 오빠 부대의 전설

성공한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그의 가수 인생 또 한 시작은 실패에서 비롯됐다. 〈서울푸레이보이〉 와 〈연예 0번지〉는 가수 남진에게 성공의 길을 열 어준 아주 소중한 디딤돌 같은 곡들이었다.

1965년이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후 우연한 기회에 한동훈 작곡가와 인연이 닿았다. 〈서울푸레이보이〉로 독집 음반을 야심 차게 발매 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뒤이은 〈연예 0번지〉는 어느 정도 히트의 조짐이 보였는데, 제목이 좋 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때 의 실망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크게 낙담을 하고 고향 목포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셨어요. 당시 〈연예 0번지〉의 앨범에 수록곡 이었던 〈울려고 내가 왔나〉를 적극적으로 추천 하시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내라고 등을 두들겨주 셨습니다.”


처음엔 트롯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습하다가 중 도 포기를 한 곡이 바로 〈울려고 내가 왔나〉였다. 녹음 당일 열두 곡을 마쳐야 하는데 한 곡이 부 족했다. 그 상황에서 억지로 부른 곡이었다. 그런 데 그 곡이 기적처럼 1965년도 최고의 히트곡이 됐다. 기대도 하지 않고 사장될 뻔한 노래가 그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한발 다가서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 곡이됐다.


“지금 트롯을 부르는 것처럼 부르지 않았었어요. 그때는 트롯 창법을 잘 구사하지 못했어요. 저는 원래 팝을 했잖아요. 그래서 내 방식대로 새롭고 순수하게 불렀는데 그게 대중들 가슴에 와 닿았 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 구성지게 불렀다면 히트 가 안 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때는 잘 꺾는 사람 들이 많았으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죠.”    

첫 곡을 히트시킨 가수에게 정말 어려운 숙제는 그다음 곡을 히트시키는 것이다. 첫 히트곡보다 더 히트할 수 있는 곡이 나와야 한다. 운 좋게도 남진은 두 번째 곡으로 가요계에 더 확실하게 자 리매김하게 된다. 바로 〈가슴 아프게〉가 그 노래 다. “당신과 나 사이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진짜 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 하동이 고향인 정두수 작사가가 쓴 곡으로 당시 스물한 살이던 남진이 보기에는 너무 촌스러운 느낌이라 제목을 바꿔 달라 요청했고, 며칠 후에

<가슴 아 프게〉란 제목으로 재탄생했다.

그 시절만 해도 노 래 제목을 그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았는데, 가사 중에 〈가슴 아프게〉란 구절이 있어서 그 부분을 그대로 살려서 제목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의 노 래 중 70%를 작곡한 작곡가 박춘석 씨와의 인연 도 이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카리스마 있는 연예인은 작 곡가 박춘석이다. 그래서 그는 박춘석 작곡가를 ‘오야붕’이라고 부른다. 한번은 일본에 있었을 때 인데 커피숍에서 아침에 박 작곡가를 만나 “오야 붕, 식사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했는데, 주위 에 있던 사람들이 야쿠자인 줄 알고 놀랐던 적도 있었단다.
“한국에서 카리스마가 제일 센 사람이 저에게는 오야붕(작곡가 박춘석)이었어요. 굉장히 멋진 분이 시죠. 약자에겐 굉장히 약하고 강자에겐 목숨을 걸어버려요. 아이처럼 순수하지만 잘못된 걸 바 로잡는데 목숨을 거는 분이죠.”


작곡가 박춘석 씨와의 만남은 가수 남진을 당대 최고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곡으로 1967년 MBC 신인 가수상을 받았다. 또 그때부터는 영 화배우로서도 대활약을 했다. 출연했던 70여 편 의 영화의 주제곡까지 부르면서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다. 어릴 적 꿈인 배우의 꿈을 함께 이루면서 대중문화계에 그야말로 ‘남진의 시대’를 열어갔다.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춤’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가수도 또한 그였다. 트위스트 곡인 메가톤급 히 트곡 〈마음이 고와야지〉는 가요계에서 가수 남진을 독보적인 존재로 부각시켰다.


“유명한 재즈발레리나 이인범 씨가 계셨어요. 생존하셨으면 93세쯤 되실 거예요. 워커힐과 TBC 최초의 안무가였죠. 무명가수일 때 KBS 한국방 송에서 한번 뵀었는데 앞으로는 가수가 춤을 춰 야 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말씀을 하더라고요. 그 말을 귀담아들었죠.”
데뷔 3년 차 되던 1967년이었다. 무대에서 춤추 는 가수가 없었다. 당시 최고 가수는 남일해, 최 희준 씨 등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안 움직이시는 전형적인 스탠딩 매너로 무대를 꾸려나가던 시절 이었다. 그러던 차에 앨비스 프레슬리가 부르는 듯한 무대 매너로 “새까만 눈동자의 아가씨~”를 외치며 노래하는 미남 가수는 소녀 팬들의 마음 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오빠 부대’는 5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곁을 지 키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곡 이나 가사를 내가 쓴 것도 아니었잖아요. 춤도 학 교 가면 장난으로 추는 수준이었는데 그런 말을 듣고 준비를 하게 된 거죠. 어릴 때 아버지가 배 타고 낚시가실 때 저는 그 옆에서 수영을 했어요. 가수는 호흡이 길어야 노래할 수 있으니 그게 많 은 도움이 되었죠. 살아온 모든 과정이 다 밑거름 이 되었던 것 같아요. 큰 행운이죠.”
전성기를 누리던 가수 남진은 해병대에 입대했다. 빨간 명찰에 카키색 군복, 그리고 팔각모가 마음 에 들었던 그는 1969년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 에 파병되어 1971년에 귀국했고 곧장 가요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그해 가요계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단독공연 ‘남진 리사 이틀’을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 었다. 4회 전 석 매진이었다. 전화 예약도 없었고, 현장 판매만 하던 시절이다. 히트곡 두세 곡 내놓 고 월남에 간 것뿐인데 공연장을 빙빙 돌아서 몇 줄로 서 있던 관객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 했다.


컴백 4개월 만에 TBC 남자가수상을 받고 1971 년부터 1973년까지 내리 3년 MBC 10대 가수 왕 상을 휩쓸었다. 누가 뭐래도 ‘남진의 시대’였 다.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던 그는 돌연 미국행을 택했고 3년이라는 세월을 타국에서 보냈다. “아내에게는 항상 고마워요. 영어 한마디 모르고 미국에 건너가서 식당을 운영했죠. 저에겐 참 힘 든 시절이었어요. 한국에 빨리 돌아오고 싶은데 계속해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3년이나 있게 된 거죠.”


‘가수’라는 직업이 아무래도 예민하고 괴짜 같을 수밖에 없다. 그 성격을 다 이해해주고 외부 활동 이 많은 데도 100% 남편을 믿어준 아내에게 고 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눈빛이 잠시 촉촉 해진다. 가수 남진이 최정상이라는 궤도를 항상 유지할 수 있었던 1등 공신은 바로 아내였다고 고 백한다.
사는 동안 내 인생을 바꾸는 인연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을 두고 스스로 ‘기적의 행운아’ 라고 칭하는 그에게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이정표를 만들어주었다. 히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의 작사가 김중순, 작곡가 김영광, TBC 황 정태 PD 등은 지금의 남진을 있게 한 시발점이 되었다.


우리나라 TV쇼의 원조 격인 TBC <쇼쇼쇼>를 만 들었던 황 PD는 그가 ‘남진 리사이틀’로 팬들을 한발 가까이 만날 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가수를 넘어 ‘아티스트’를 지향하다


1980년대 초반 잠깐의 공백기를 거쳤으나 역시 그에게는 무대가 제 자리였고 가수가 천직이었다. 대중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 그를 기억하 는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했고 그때마다 다시 히트곡들이 탄생했다. 1982년 〈빈잔〉에 이어 2000년 〈둥지〉, 2008년 〈나야 나〉,

<당신이 좋 아〉로 이어졌다. 지난해에는 〈오빠 아직 살아있 다〉를 신곡으로 내놓았다.
데뷔 시절부터 따지면 벌써 57년이나 흘렸다. 예 나 지금이나 가수는 팬도 있고 인기도 있어야 한 다. 다만 그는 ‘가수는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만큼은 변 함없다. 물론 모방도 잘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추 어라면 몰라도 프로 가수가 되는 순간 자신만의 독톡한 색은 필수요소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늘 기억에 새겨진 선배 가수가 있다. “현인 선생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원래 샹송을 잘 불렀던 분이죠. 작곡가 박시춘 선생과 인연이 되 어 〈신라의 달밤〉을 부르며 1940년대 당시 최고 의 가수였죠. 당시 유행하던 창법이 아닌 샹송을 접목시킨 듯한 창법이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 를 끌었습니다. 선생님만의 색깔이었던 거죠.” 세미 데이비스 주니어(Sammy Davis Jr.)는 그가 가장 닮고 싶은 연예인, 아니 예술가이다.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악기, 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구사해 낸다. 특히 재치있는 입담과 탭댄스, 무대 위에서의 매너와 에너지는 요즘의 가수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예술가라고 평가 한다.

다시 태어나면 세미 데이비스 주니어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 꿈이다. 아니 20년의 세 월만 더 주어진다면 더 진솔하게 더 뜨겁게 음악 을 만나고 싶은 욕심을 부려보는 아직도 음악에 는 청춘인 그다.
노래의 깊은 맛을 내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또한 좋아하는 아티스트다. 툭툭 내뱉는 담담함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맛이 들 어가 있다. 양념을 많이 안 바른 것 같은데 깊이 들어가면 가득 차 있다.

마치 묵은지처럼 기교를 넘어선 맛이 있다. 화려하지 않고 스탠더드한데 필(feel)이 그 안에 꽉 차 있다고 표현한다. “같은 노래라도 한 해 한 해 부를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 20대 30대에 불렀던 곡이랑 그 곡을 70 대인 지금 불렀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죠. 완전 히 다른 노래가 됩니다.

다른 마음으로 부르니까 요. 지금까지의 삶과 감사의 마음이 들어가니 다 른 노래일 수밖에 없죠. 피치나 힘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감성이나 느낌은 세월이 지나온 만큼 두 텁습니다.”
노래를 떠나서는 더 이상의 축복이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간절해진다는 그는 자신의 노 래에 만족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만 번을 불렀어도 계속해서 아쉽고 고쳐야 할 부분들이 보인다고. 노래는 스스로에게 남아 있는 평생의 고지란다.


“연습도 연습이지만 음악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 해요. 이탈리아의 대중가요 칸초네(canzone) 중 에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곡이 있어요. 소름 이 끼칠 정도예요. 기교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한 참 뒤에나 중요한 요소죠. 먼저 노래의 진정성이 있어야 해요. 그 노래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됩 니다. 악기도 별거 없는데 그저 담담하면서도 가 슴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 하나로 깊은 감동을 주 죠. 저도 그런 노래를 하고 싶어요.”
노래를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가사라고 말 하면서 음악을 좀 알 것 같으니 더 욕심이 생긴다 고 한다.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노래를 하 고 싶다는 그는 요즘에도 매일 다섯 시간씩 음악을 듣고 부르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대한민국의 반세기 가요사를 함께 해온 그 무게 만큼이나 그의 개인사 또한 파란만장의 연속이 었다. 죽을 고비도 많았다.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바로 옆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되지 않았더라면, 고향에서 허벅지에 칼을 맞았는데 그 칼이 대동 맥 쪽으로 1㎜만 더 갔더라면 지금의 가수 남진 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아주 무서운 고비마다 운 좋게 살았는데 운도 한 번이지 두 번 세 번은 운이 아닌 거예요. 나라고 해서 왜 애로점이 없고 불편한 점이 없었겠어요? 가정사도, 사회생활도, 가수로서도 수많은 어려 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극복하게 해주신 거라 고 생각해요. 많은 생각 중에 이겨 낼 수 있는 생 각을 주시고 벌써 사라졌어야 하는 사람을 긴 세 월을 꽉 잡고 끌어와 주신 거죠.”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는 그다. 매 순간 습관과 생각, 그리고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기도를 한다 는 그가 〈트롯전국체전〉에서 심사위원으로서 했 던 말이 있다.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더 잘 될 수 있다’라는 위로의 한마디.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참가자들에게는 인생 선배로서의 따스함으 로 다가갔으리라.
그는 이제야 음악이 보인다고 했다. 삶의 지혜도 최정상급이다. 간절한 만큼 더 열심히 연습하고 건강을 챙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열정이 신곡 제목처럼 오빠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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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남진에게 궁금한 것들


세대 아우르는 ‘남진 쑈쑈쑈’ 꼭 한번 하고 싶어


30~40년 이상 차이나는 후배 가수들과 함께 노래하고 방송에 참여한다. 세대 차이 같은 걸 느끼지는 않은지?


노래로는 세대 차이를 못 느낀다. 열정도 마찬가지다. 건강의 차이 는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더 애절하고 더 소중하니까. 음식 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고 노래 맛도 나이가 들수록 더 느 낀다.
전설의 가수이지만, 10대 20대 일반인 중에는 모르는 사람도 많다. 본인을 몰라봐서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었나?
꼬마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7, 8세가 알아보고 사진 찍자고 할 때 는 감동이다. “아저씨 팬이에요,” 하고 오면 “아저씨 아니고 할아버 지지~.”하고 말한다. 하하. 그런데 애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괜찮 은데 중·고등학생이 못 알아보면 섭섭할 때가 있다. 가끔 여학생 들이 ‘오빠’라고 부른다. 그 엄마들이 나를 부를 때 하는 말을 듣고 똑같이 불러주는데, 정말 힘이 난다. 기분이 참 좋다.


예전보다 목소리 내기가 힘들다거나 생각대로 터지지 않는다 는 느낌이 들 때가 있나?


당연히 있다. 톤이나 파워가 좀 줄어들었다. 옛날에는 소리가 좋았는데 그때처럼 안 나올 때가 있어서 그럴 땐 아쉽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그럴 때 실감한다. 하지만 감성은 오히려 옛날에 못 느 꼈던 깊이로 빠져들어 갈 때가 있는데 그런 경 우 기분이 좋다.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는 공연이 나 이벤트가 있는지.
계획 중인 것이 있다. 사실 <쇼쇼쇼> 같은 그런 쇼가 없어진 지 오래됐는데 그런 쇼를 해보고 싶다.
세미 데이브스 주니어(Sammy Davis Jr.) 쇼, 앤디 윌 리엄(Andy Williams) 쇼, 냇킹콜(Nat King Cole)쇼 같은 쇼다. 내가 혼자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노래 잘하는 가수들과 후배들까지 다 초대해서 쇼를 하는 거다. 젊은 층부터 나이 드신 분들까지 볼 수 있고 눈물도 있고 추억 도 있고 편안히 다가오는 그런 쇼가 그립다. 이를 테면 기타 하나 가지고 듀엣으로 부르든지, 남인 수 선생님이나 현인 선생님 노래 같은 흘러간 명 곡을 재밌게 불러보는 거다. 요즘은 너무 쇼가 없 으니까 꼭 한번 하고 싶다. 지금 방송국과 절충 중인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 후반기에는 이루어 지지 않을까 싶다.


‘남진’ 두 글자로 가장 자기다운 2행시를 짓는 다면?


남 : 남자다운 인간과 가수로서
진 : 진짜 가수이고 삶이 되고 싶다


언제 봐도 활력이 넘친다. 건강 유지 비결이 있는지?


평소 수영을 많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하고 있어 아쉽다. 홍삼 같은 건강보조제도 먹고 되도 록 소식을 하는 편이다. 야식은 안 하려고 한다. 공연하고 나면 배가 고파서 무엇이든 먹고 자곤 했는데 요즘은 억지로라도 밤에는 참는다. 그 덕 에 체중이 7~8㎏ 줄어들었다. 뿌듯하다.
가수 활동이 57년이다. 이제는 무대에서 긴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갈수록 더 많아진다. 라디오 는 편안하게 방송하는데 텔레비전은 무섭다. TV 무대에서 1곡 노래하는 3분 30초는 한 시간 반짜 리 영화라고 생각한다. 의상부터 표정, 노래까지 다 갖추어서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노래 도 하나의 영화다. 젊은 시절 영화를 해봐서 아 는데 감정을 얼굴로 몸으로 말로 표현하려니 나 자신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TV 무대는 굉장히 긴장되고 그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 해 노래에 몰입한다. 몰입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혼자 몰입하면 안 되고 남 보기 좋게 몰입해야 한다. 그게 어려운 거다. TV는 여전히 무섭고 조심스럽다.


백여 장의 앨범을 냈다. 전설의 가수이지만 발 표 후 뜨지 못한 곡이 있었는지?


노래 1000곡 중 30곡 뜨면 많이 뜬 거다. 가수 는 큰 히트곡 10곡만 있으면 최고다. 〈상사화〉라 는 노래가 있는데 그건 팝 가요다. 트롯은 아니 다. ‘모란이 피면은 모란으로~’. 그 노래의 멜로디 와 가사를 좋아하는데 뜬다고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후배들이 불러서 띄우더라. 〈파트너〉라는 노래도 있다. ‘1년 365일 동안~’ 완전히 톰 존스 (Tom Jones) 노래다. 또 그게 뜨더라. 시대가 변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과거엔 내가 좋아서 녹음 을 했지, 그 노래가 꼭 히트칠 곡이라고 생각해서 발표하지는 않았다.


<둥지〉가 그렇다. 20여 년 전 그 당시엔 MBC에 노래가 나와야 히트가 될 가 능성이 큰 그런 시절이었다. 6개월에 걸쳐 방송 을 통해 나갔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 앨범에 있는 12곡 중 하나를 골라서 〈이것이 사랑인가요〉로 바꾸라고 했다. 만약 그때 바꿨다면 〈둥지〉는 그 날로 끝났을 것이다. 처음엔 사람들이 적응을 못 하다가 1년에서 1년 반이 지나니 인기가 붙기 시 작했다.
요즘 부르는 〈오빠 아직 살아 있다〉는 라틴음악 풍의 노래다. 리키 마틴 스타일로 가요가 아닌데 도 사실 내가 좋아서 부르게 됐다. 다만 대중성 이 있는 리듬이다. 이제는 신곡이라면 가사가 특 이해야 하고 멜로디가 뭔가 색달라야 한다. 포인트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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