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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공예가 박만순 장인 "365가 만난 장인의 손:시간의 흐름 속에 예술혼을 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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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가 만난 장인의 손: 옻칠공예가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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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 속에 예술혼을 칠한다"

 

옻칠공예는 나무와 시간 그리고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의 세계다. 옻칠은 나무를 비롯한 금속, 도자기, 대나무, 가죽 등의 소재와 만나 다양한 칠공예품으로 재탄생한다.

특히 자개와 만난 나전칠기는 서양에는 드문 공예품으로 빛의 예술품이 된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30여 차례 장인의 손을 거쳐야 완성도 높은 옻칠공예 작품이 탄생한다.

2017년 대통령 독일 국빈 방문 시 정상선물로 가져간 포도문 보석함45년 간 칠공예에 인생을 칠한 옻칠공예가의 작품이었다. 박만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한국 전통공예의 백미였다.

글 박창수 기자, 사진 최재희 기자

 

2천년 역사를 칠하고 칠해 빛을 내다

코로나19 펜데믹은 옻칠공예가 박만순 장인에게도 아쉬운 사연을 남겼다. 지난해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시카고 SOFA 아트페어에는 한국황실문화갤러리 주관으로 115~12일까지 6인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박만순 장인도 이 전시회에 은평문나전함 시리즈’, ‘혼수함’, 초충도함 시리즈등 작품 5점을 전시했다. 당초 오프라인으로 계획된 아트페어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한국의 전통예술과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널리 알리는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흔치 않은 유명 해외전시회의 기회가 온라인으로만 진행된 데는 여러모로 속상한 일이지만, 옻칠은 어차피 평생을 두고 하는 천직으로 받아들인 그로서는 실망과 낙담을 할 일만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자신의 작품을 더 넓은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박만순 장인은 63세의 옻칠공예가다. 그는 지난 45년간 옻칠공예 한 길만 걸어왔다. 전승공예 출품작으로 재현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역사적인 고증 자료를 찾아내 문양과 형태를 재현하면서도 자신만의 손 기술과 생각을 담은 창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열정을 쏟아왔다.

이미 그의 이름이나 작품들은 옻칠공예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입지는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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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내 손 기능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열정이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마칠 때마다 항상 아쉬움이 남습니다. 100%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떠오르는 겸손의 말로 들린다. 다만 100% 만족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나름 일리가 있기도 하다. 전통기법으로 구현하는 옻칠공예 특성상 작가의 능력을 떠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해한 환경적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옻칠공예가 갖는 특별함이기도 하다.


옻칠공예는 옻나무의 수액인 옻을 이용하여 기물에 칠을 하는 것이다. 나무, 수액, 삼베, 한지, 자개 등의 재료들이 하나같이 천연재료다. 가장 중요한 재료인 옻의 수액도 지역에 따라 채취시기에 따라 성질이 다른데다 건조과정에서 습도와 온도의 영향을 받는다. 작가가 아무리 열정을 쏟아도 완성도에 있어서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얘기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옻칠공예품은 표면에 막을 형성하여 광택이 좋고 부착성, 내수성, 방부성, 방충성, 절연성 등이 뛰어나 과학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색과 형태가 쉽게 변하지 않는 다는 특성과 그 가치만큼이나 한국 옻칠공예의 역사는 가히 놀랍다.

경남 의창 다호리 유물 기준으로 2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는 것이 증명됐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칠의 흔적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말기인 B.C 3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보다 수세기 앞서는 시대로 추정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옻칠공예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나전칠기가 단연 두드러진다. 나전칠기는 전복이나 소라패를 가공한 나전으로 줄음질, 끊음질기법으로 문양을 오리거나 길게 썰어 칠면 위에 붙이거나 끼워넣는 방법으로 만든 공예품이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명품이 많이 만들어졌고 상감청자와 함께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으니 한국 전통예술로서의 한 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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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부터 시작된 칠공 인생 45년 


옻칠공예는 옆에서 보면 지루하고 답답하고 짜증 난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작가도 사람이니 마음은 매한가지다. 다만 긴 시간을 투자한 만큼 생명력이 긴 공예이기에 옻칠공예가들은 시간을 깔고 앉아 칠 하고 다듬고 기다리고 다시 또 칠한다. 

2천 년 전 다호리 유물을 현재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런 장인들의 머리와 손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있었다면 멈추었을지도 모르죠. 그냥 먹고 사는 것 이상의 경제적 효과는 없는 일이기에 그나마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것 같아요. 그러니 팔자에 자식이 없는 것도 저에게 이 일을 계 속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 

학창시절 연필만 손에 쥐면 당시 잡지에 나오는 각종 만화의 캐릭터들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학원에 다닌 적도 없었으니 타고난 손재주였다. 유명한 만화가 밑에서 깊이 배울 수 있도록 누군가가 다리를 놓겠다고 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건만 물거품이 됐다. 


그 시절 자개장 공장을 갖고 있던 그의 백부이자 나전칠기 작가 고 박병억의 공예사에 들어가 3년간 기술자들 밑에서 칠 공예를 배웠다. 백골부, 자개(나전)부, 칠부(옻칠)에 각각 전문인력들이 있었고 그들 아래서 손에 물집 잡히는 고통을 참아내며 일했다. 그의 남다른 바닥표면 연마하기와 각과 모서리 모양을 잘 살려내는 실력도 그때 익힌 기능이다. 그 후 더 고급스러운 옻칠을 배우고자 공방을 옮겨 다니면서 20대 시절을 보냈고 30대 초반에 다시 백부의 공장에 총책임자로 들어가 완성도 높은 제품을 만들어 냈다. 


그가 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것은 나이 마흔에 아내 김순겸 씨와 결혼을 하면서부 터다. 

“IMF 외환위기도 발생하고 그 무렵 결혼을 했으니까 갈등도 생겼어요. 다른 일을 할까 고민도 했 던 게 사실입니다. 잠시 전기부품 공장을 운영하던 친구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 길이 아니 었나 봅니다.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20년간 걸어온 나전칠기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어가라고요” 


고양시 외곽의 빌라 안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1인 옻칠공방을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인지도 높은 공방들의 위탁을 받아 작업을 해주기도 하고 자신의 창작활동을 겸했다. 옻칠공예는 그 과정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여러과정을 거친다. 일반적으로 목기를 만드는 것도 갈고 칠하기를 5~6회 이상 반복하여 완성한다. 하지만 목심저피칠기법으로 만드는 나전칠기는 더 많은 과정을 거친다. 

자개를 붙이기 위한 칠면을 만드는 과정만 해도 백골(나무, 금속, 가죽, 한지, 도자기, 대나무 등)에 생칠하기를 시작으로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삼베 바르기, 한지 바르기, 토분과 생칠이 혼합된 토회 바르기 등등 10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한 공정마다 칠 건조장에서 건조가 된 후 바로 다음 공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실온에서 다음과정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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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순 장인의 특기인 평탈기법(나전면과 칠면의 높이 동일) 나전칠기 작업은 기물의 칠면에 자개를 붙인 후 토회 바르기, 연마하기, 흑칠(黑漆)이나 주칠(朱漆)하기 등을 반복해야 한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무려 30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작품이 탄생한다. 

“옻나무에서 추출한 천연 도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칠을 하고 섭씨 25~30℃, 습도 75~85% 정도의 칠장에 건조 해야 합니다. 바탕 재료의 특성에 맞게 작업 방법을 다르게 적용하고 계절에 따라 건조시간도 달라져 옻을 오랫 동안 다뤄온 숙련된 기술이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화려한 경력 속에 가려진 칠 장인의 고된 삶 


그는 “장인은 손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고, 다른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창작 자 입장이기에 자신만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말 못 할 고통을 손끝으로 풀어내야 하는 인내의 연장선에 갇혀 있다고. 

그래서일까. 그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10 여 년 넘게 마땅한 공방도 없이 집안에 마련한 작업방에 서 고독과 시간 그리고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가 ‘박만순옻칠공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부천시로 이전 하면서 공방과 자신의 이름을 앞세울 수 있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손의 기억을 끌어내어 머릿속으로 옮기죠. 일하면서 머리와 손이 어우러져 새로운 것을 발 견하고 그것을 작품에 반영합니다.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누군가 정교함과 세밀함으로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은 ‘나전원형합’을 보고 저에게 물었어요. 

“레이저로 작업하셨나요?”라고요. 그저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 습니다. 저 말고도 모든 분야에서 장인들은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일을 하고 있어요. 장인들마다 그들의 손기술이 있는 거지요”

 

2000년대에 들어 그에게는 프로필에 일일이 옮겨놓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경력이 생겼다. 

2007년 ‘제1회 부천 한 국문양공예대전 대상’을 비롯해 ‘11회 한국문화재기능인 작품전 대상’ , ‘12회 한국옻칠공예대전 대상’, ‘17회 남원 시 전국목공예대전 대상’, ‘제45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제46회 경기도 공예품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일본 공예의 현재전’(가나자와미 술공예대학 아트갤러리, 2012),‘한국문화재재단 초대작가 박만순옻칠 개인전’(2017), ‘나전과 옻칠, 그 천년의 빛-한. 영수교 70주년 기념행사’(2019) 등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고 문화재수리기능인 시험 감독, 면접위원 위촉, LG 생활건강 숨(SUM)37 화장품 상자 국가무형문화재 조각 장곽홍찬 협업, 2018 경기공방학교 대표 공방 선정 등의 다양한 이력도 쌓였다. 

매스컴에 노출된 횟수도 수없이 많고 2017년에는 ‘옻칠 나전 트레이(복 숭아문)’ 유럽 지식재산권 등록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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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이젠 먹고살 만하다’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 니 창작의 길을 걷는 옻칠공예가의 삶은 그저 고된 시간의 연장이기만 하다. 

“저는 그냥 밥 먹고 작업만 하면 됩니다. 제가 택한 예술의 길이니 오히려 밤새워 일하고 손이 아프고 눈이 침침해져도 괜찮아요. 단지 옆에서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생한 만큼 해줄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다는 게 가슴 아픈 일입니다. 늘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아내 김 씨는 그에게 필요한 역사적인 고증 자료를 도서관을 돌며 찾아다 주고 공방의 잡무를 대 신 담당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일도 아니고 오로지 남편의 작품 활동을 돕는 역할이다. 

어 쩌면 이런 김 씨가 그에게는 최고의 재산이자 선물이 아닐까 싶다. 


시간, 나무, 사람이 하나 된 끝이 없는 작업 


플라톤이 말하기를 ‘장인은 어떤 일이든 대충 일하기를 거부하고 최고의 경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박만순 장인의 작업을 지켜본 사람들은 ‘작업에 대한 몰입도가 높다’라고 평 하지만 그건 피상적인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제가 생각하는 옻칠은 부처입니다. 수행의 길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길입니다. 항상심(恒常心)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저 숙명처럼 여기고 일합니다. 그게 칠장이의 삶이니까요” 


장인의 깊은 속을 그래도 하늘은 알고 있는 걸까.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특별한 사연이 그에겐 있다. 2013년 9월 ‘12회 한국옻칠공예대전’ 때의 일이다. 공들여 준비한 작품을 싣고 원 주로 향하던 날 갑자기 운반 차량에 고장이 발생했다. 그 이전에도 이런저런 사연들로 수상의 기 회를 놓쳤던 터였다. 순간 그는 ‘내 복은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다’라고 포기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하늘이 도운 게 맞다. 막막한 그 상황에 다행히도 렌터카가 달려와주었고 다시 작품을 싣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최고의 상으로 인정받는 그 대회에서 ‘나전 고려청자문 책장’이라 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역사적인 명품으로 전해져오는 칠공예 이상으로 예술성을 부여한 창작품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제 손기술은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옻 수액에 노출되는 시 간이 많아질수록 제 시력도 약해지는 것 같아서 그게 염려스러운 부분이죠. 그리고 이제는 무거 운 작품을 옮길 때 힘이 달려요” 

몇 년 전 그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시대의 궁궐잔치에서 사용되었던 임금님 상 ‘칠 투각 원형두리반’을 그대로 재현했다. 보물이 따로 있을까 싶을 만큼 옻칠공예 절정의 미를 보여 준다. 나무와 사람 그리고 시간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창작의 세계 ‘옻칠공예’는 박만순 장인에게 있어서 삶이고 곧 생명이자 무욕의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옻칠공예가의  예술혼 에 무엇으로 답하고 있는 걸까에 대한 의문이 던져진다. 


어느 외국의 명품 브랜드는 장인의 가치를 50억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가방 장인이 되기 위해서 는 3년을 교육받고 2년간 숙련공 기간을 거친 후 만든 가방이 천만원에서 3천만 원에 팔리면서 평생 먹고 사는 일을 책임진다. 그러니 수십 년간 우리 전통공예의 맥을 잇는 장인들의 축적된 가치 앞에서 우리는 어떤 보상을 해줘야 할까. 바로 그게 우리 시대의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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