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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혼 ! 고려청자를 다시 불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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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창  김세용 명장

 

천년의 혼 !  고려청자를 다시 불러내다

 

은은한 옥빛이 스며든 맑은 빛깔의 청자에 천년의 세월이 입혀져 흐른다. 장인의 손이 새긴 사군자와 새들은 1,300℃의 열기 속에서 도공의 50년 삶을 품고 흙이 아닌 역사와 예술로 승화된다. 이중투각 삼중투각으로 다시 태어난 도자기들은 흙, 물, 불, 바람 그리고 도공의 혼이 혼연일체가 된 고려청자다. 세창 김세용 명장은 직접 만든 흙과 유약 그리고 자신만의 투각기법으로 청자의 맥을 어어 간다.

글 박창수 기자  사진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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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을 떠올리며 오늘을 빚는 도예가

물레 위의 기물이 도는 속도와 일흔여섯 도공의 손끝이 호흡을 맞추는 시간은 세상이 멈춘 듯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손이 흙이고 흙이 손이다. 무욕의 시간 속에 몰입하는 장인의 심오한 눈빛과 손은 흡사 두 개의 톱니바퀴가 하나로 맞물린 듯 그렇게 21세기 하루를 흙의 끈으로 감아낸다.

경기도 이천 신둔에 자리한 세창 김세용 명장의 도예연구소. 청자 이중투각의 장인인 김세용 명 장의 손은 오늘도 어김없이 흙과 함께 움직인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 이새담 여사는 행여라도 훼방꾼이 될까 조심스러워 숨죽인 채 바라만 본다. 흙이 숨 쉬는 온도의 지하층 작업 실은 1층의 전시실에 자리한 그의 대작과 수작 들을 잉태했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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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 금강산문 매병>

 

“바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가하지도 않아요. 흙을 만지는 게 곧 내 삶이니까 물레 돌리듯 반 복된 일상이지요. 흙을 만지는 촉감이란 아내의 살결을 만지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마냥 자유롭고 평화롭죠”

흙과 놀아서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그는 누구의 주문을 받고 작품을 만든 지는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됐다. 작품을 팔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 저 영감이 떠오르면 손이 가는 대로 마음 품은 대로 작업에만 몰두한다. 다만 청자는 잘못 만들어지면 천박하므로 우아함이 느껴지는 작품을 빚고 구워내야 한다는 철학은 변함이 없다. 김세용 장인은 고려청자에 입문한 지 36년 되던 2002년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청자로 명장이 된 도예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흙과 유약은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나무도 긴 시간을 거친 것 들만 불태운다. 이중투각 삼중투각은 그가 가장 먼저 성공시킨 기법이고 오로지 내화벽돌로 지어 진 전통가마를 고집해왔다. 청자로 명장의 칭호를 받기에 마땅한 그만의 도예 세계다. 

요즘 들어 자주 떠올리는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도공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그 나이에 그리고 한순간에 청자에 빠져들 수가 있었는가 싶은 거죠. 신비함이 느껴져요”

자기 내면의 세계에 대한 정리이니 그냥 흘려들을 얘기는 아닌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럴만한 특별한 사연이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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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서 만난 스무 살 청년의 첫사랑

‘고려청자’

경기공고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단체 견학을 갔다. 1.4 후퇴 때 지금의 비무 장지대인 경기도 장단마을에서 내려온 실향민으로 일찌감치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던 그였다.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미군에 배달되는 성조지(영어신문)를 배달 하던 청년이었다. 미래를 꿈꾸기보다 현실의 생활고 해결이 늘 급했다. 하지만 그날 고려청자는 그의 인생의 방향을 못 박아놓고 말았다.

“고려청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순간 시선은 멈췄고 가슴은 덜컹 내려앉는 특별한 기분이 들 었어요. 이게 뭐지? 이런 거였습니다”

김 명장이 대놓고 첫사랑 ‘청자’ 얘기를 하는 이유다. 고려청자와의 만남은 숨이 멎을 듯 긴장과 설렘으로 엉킨 아주 특별한 첫 경험이었다고. 그 날 밤부터 온통 머릿속은 청자뿐이었다. 책을 구 해 읽었다. 당장 흙을 만질 수는 없었다. 집안 형편 탓에 학교를 1년 늦게 진학한 그로서는 나이 때문에 입대가 복병이었다. 월남 파병까지 다녀 온 뒤 군 생활이 끝나고 나서야 당시 부친의 친 구 아들이 운영하는 이천의 한 도예 공방에 들어갔다.  

1971년도였다. 이천지역에 도예 공방은 예닐곱 개 정도였다. 청자기술에서는 한 수 아래인 일본 인들이 고려청자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던 시기 였다. 그 시절 국내 여타 기능의 기술 분야가 다 그랬듯이 도예 공방에서도 갓 들어온 직원은 허드렛일이나 도왔다.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예에 빠져들려고 이미 작정한 길이었다.

 “어깨너머 눈으로 알아서 배우는 식이었지요. 저녁에 혼자서 만들어보는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타고난 길이었나 봅니다. 학생 때 그림과 서예에 나름대로 재주가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사 람들보다 좀 빠르게 익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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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은 넘게 배워야 그나마 흉내라도 낸다는 도예를 5년 만에 익히고 같은 공방의 조수로 일하 던 이 여사와 결혼을 하면서 독립했다. 가진 것도 없었다. 3년 동안 부부는 낮엔 남의 공방에 가서 일하면서 얻어온 흙과 유약으로 밤마다 반죽하고 물레 성형을 했다. 가마가 없었으니 이 또한 일해 준 품삯 대신 빌려 사용했다. 그 시절 부터 지금까지 이 여사는 그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였다. 매사에 신중하고 섬세하며 내면의 세계를 다지는 김 명장과는 달리 아내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통이 큰 사람이었다. ‘무너지더라도 젊었을 때 도전을 해야 한다’라며 남편이 독립하도록 등을 떠밀었다. 도예가에겐 손이 생명인 만큼 무거운 것은 들지도 못하게 했다.

흙을 만지는 손이 달랐을까? 본래 청자에 불어 넣은 혼이 살아 있었던 걸까? 작품은 만들기 무 섭게 중간상인들을 통해 팔려나갔다. 그 무렵 어려움은 내 땅이 없었으니 가마터를 짓고 나면 또 다시 이사해야 하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해야 했다. 1978년, 그해는 좌절과 희망이 공존한 해였다. 대량의 흙과 장작을 구해다 쌓아 놓았는데 장마에 가마가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가마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수소문 끝에 1,400℃로 구워져 불에 강한 내화벽돌을 찾아냈다. 그 이전까지 만 해도 가마에 내화벽돌을 사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사용한 중고내화 벽돌을 구해다 가마를 지었다. 흙벽돌을 사용한 게 통례였으니 주변 도공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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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흙벽돌로 지은 가마는 24시간만 불을 때면 되는데 조선내화 벽돌은 자그마치 이 틀을 때야 했다. 준비해놓은 장작이 부족해 주변에서 급조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하나같이 ‘저건 망했다’라고 했을 정도다. “첫 시도였으니 나 또한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어요. 그래도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가마가 식어갈 즈음 플래시를 안에 비춰봤죠. 그런데 정 말 신비스러웠어요. 옥빛 청자가 나타났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죠.”

10전 11기 끝에 탄생한 대작 ‘외금강만물상’ 불의 온도가 청잣빛을 좌우하는 신의 한 수임을 터득한 세창은 이때부터 청자에 대한 자신감을 굳혔다. 1981년 전승공예전에서 입선을 한 데다 빛이 다른 작품을 만드는 장인으로 화제가 되면서 작품을 구매하려는 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동안 작품을 팔기도 했지만, 중간상인들의 시시콜콜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찍어내듯 만들어내는 도공의 길도 그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기에 자신만의 혼을 담은 작품 만들기에 주력했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을 개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흙, 유약, 도예 공정 등을 개선하고 도자기 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시간을 쏟았다. 흙을 깨 끗하게 빨리 말리는 방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반복하며 거액의 손해도 봤지만 잃은 것 보다는 이룬 게 더 컸다. 이중 삼중투각기법을 성공시킨 것도 바로 이런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천 년 전 고려청자는 투각은 있었지만 이중투각은 없었다. 속기물을 작게 만들어 먼저 만들어진 겉기물 속에 넣은 후 조각을 하는 방식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이중 투각 국화과형 화병을 빚어 선물하면서 ‘투각의 대가’임을 재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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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이었어요. 대한민국 명장 349호로 선정 되던 날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기쁨을 느꼈어요. 입문한 지 36년 만이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청자로 명장이 된 첫 번째 도예가이기에 더 의미가 컸습니다.”

그를 대변하는 언어는 ‘이중투각의 대가’라는 말과 ‘대작을 만드는 명장’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 나로 꼽히는 ‘외금강만물상’은 상하 길이가 자그 마치 1m가 넘는다. 기물이 가마에 들어가면 화 력에 의해 보통 15%는 수축한다고 볼 때 제작 과정이 여간 어렵지 않았을 터. 한 번 만들어서 굽기까지 1년의 세월이 소요됐다. 굽는 과정에서 금이 가고 깨지는 일이 반복됐다. 자그마치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열 번 실패하고 열 한 번 째 성공한 만큼 ‘10전 11기’ 작품이라는 영광의 꼬리표도 달았다. 이 작품에는 부친과 얽힌 사연도 숨어있다. 6·25전쟁 이전에 금강산을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부친은 죽기 전에 금강산 한 번 더 가보고 싶다는 소원을 내비쳤고 아들은 작품으로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안타 깝게도 부친은 이 대작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화유산 강국이 되어야 한다”

세창 김세용 명장은 도자기를 만들며 스스로 정립한 4가 지 원(願)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가장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자. 둘째, 가장 정교한 청자를 만들자. 셋째, 가장 큰 청자를 만들자. 그리고 마 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마음의 수행으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나만의 제토공정이나 유약을 만들 수 있었고 이중투각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이 네 가지 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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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송호문호>

 

내년이면 희수(喜壽)를 맞이한다. 그의 바람은 무엇일까? 세창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고려청자와 한국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더 넓게 자주 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지난해 LA한국문화원의 초대를 받아 현지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었다. 작품들은 이미 운반됐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내년 9월로 연기된 상황이 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기다림이 있으면 더 큰 보람과 즐거움도 있지 않겠냐고 한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도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는 작가 자신만의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건 쉽게 빨리 형성되는 게 아니죠. 한두 번 시도해보고 포기하면 안 되거든요. 끝없이 도전과 도전을 거듭할 때 자기만의 예술세계에 안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화강국이 세계강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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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길 기대 합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그의 가족은 모두가 도예 안에 서 각자의 길을 찾는다. 아내는 자신의 내면을 나비와 꽃 을 소재로 승화시켜 작품으로 만들고, 조소와 소재를 전 공한 공학박사인 아들 도훈 씨는 미국에서 세라믹을 이 용한 작품활동과 강의를 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병행한 다. 딸 현정 씨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빚는 생 활도예에 전념해왔다. 

청자 이중투각의 장인 세창 김세용 명장! 그의 얼굴에 물든 잔잔한 미소는 흡사 맑고 은은하면서도 우아한 청자의 기(氣)와 미(美)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김세용의 감각은 불교적인 바탕이 합리와 정제의 보살 같은 표현 미가 친근하다’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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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김세용 장인은 1966년 도예에 입문했다. 1997년 ‘문체부 도자기공모전 금상’ 수상에 이어 2002년 대한민국 명장 349호로 선정됐다. 2006년 제1회 개인전 ‘흙에서 빛으로’(세계도자센터), 2017년 밀라노 ‘법고창신전’(문광부 주최), 2019~2021년 ‘런던 COLLECT 박람회 출품’(영국공예청), ‘2012~2020년 대한민국명장전’ 등 다양한 전시회 및 출품전을 가졌다. 2019~2020년 이천시도자명장 심사장, 2020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예선심사장, 2021~2023년 국가기술자격정책심의위원 등으로 위촉받 았다. 2017년 대한민국문화훈장 화관장(237호) 서훈을 받 았으며 저서로는 “전통기법을 재현한 도자기공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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