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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세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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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세레나


어느새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간 걸까? 설레는 마음과 열정은 데뷔했던 동아방송 오디션 때나 똑같건만 어느새 반세기를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났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등으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공연장에서 팬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내심 아쉽고 속상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은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 노래하는 김세레나, 나의 모습이 생생하기 때문이리라. 노래는 내 인생의 전부였기에. 봄이 오면 다시 무대 위에 올라 그 옛날 베트남전 위문 공연 때처럼 신명 나게 멋진 공연으로 우리 국민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안겨주고 싶다.

글 박창수, 사진 최재희 , 사진제공 김세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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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최초 경연에서 장원에 오르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인생이란 한 번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할 만큼 소중하다. 뒤돌아보면 참 위험한 도전이었다. 간혹 그때 과감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또 어떤 길을 걸었을지 생각해볼 때도 있긴 하지만 나에겐 이미 타고난 가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노래는 운명이자 숙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1964년 그때로 시간을 돌려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열일곱 살 소녀에게는 각오, 모험, 영광이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나는 충남 논산시에 소재한 쌘뽈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노래만큼은 끼가 남달랐기에 신분은 여고생이었지만 이미 친인척이나 부모님 지인의 환갑잔치 같은 행사와 논산훈련소 위문 공연 무대에 오르면서 반 연예인이 돼 있었다. 

그러니 책가방 속에 립스틱과 마스카라 같은 기초화장품을 필수로 소지하고 다니며 방과 후엔 행사 무대로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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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지난 2014년) 연무대 육군훈련소 입소대대 앞에 <김세레나 노래비>가 세워진 이유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내보낸 후 교사들이 일제히 소지품 검사를 했다. 이때 화장품이 발각되면서 한순간에 불량소녀로 낙인찍혀 학교에서는 정학 조처를 내렸다. 가톨릭 학교였기에 규율이 매우 엄격 했었다.  

내 꿈은 가수, 무용가, 영화배우 중 하나는 되는 것이었다. 서울로 가는 것만이 온전히 내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작정 종로에 사는 당고모댁으로 올라왔다. 당시 종로구 관훈동에 국악예고가 있었다. 노래와 춤 실력을 보고 인정한 당고모의 권유로 국악예고 실기테스트를 받은 후 당당하게 전학을 할 수 있었다. 순전히 내 의지로만 결정하고 감행한 일이었으니 누가 봐도 당찬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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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동아방송은 개국 1주년을 맞아 국내 방송사 최초로 가요백일장을 진행중이었다. 

학생 신분으로서는 방송 오디션에 나갈 수 없는 시절이었지만 단짝이던 친구가 함께 나가보자고 부추겼다. 오전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조퇴를 한 후 사복을 입고 오디션을 봤다. 1차 무대인 월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해 연말 결선 무대에 올라 장원이 되면서 내 노래 인생의 흥행 가도가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입학금이 5만 원이던 시절 3만 원 상금을 받고 동아방송 전속 가수가 됐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연예 활동으로 이어졌고 신세기레코드에서 〈새타령〉(1967년), 〈갑돌이와 갑순이〉(1968년)가 잇달아 발표되면서 그야말로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로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은 스타 탄생의 등용문이 되어 김부자, 조미미, 남성 중창단 쟈니 브라더스 등이 이 가요백일장을 통해 가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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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학업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인기가수가 됐어도 대학은 반드시 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고려대학교 입학이 확정돼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모아놓은 대학 입학금이 아버지의 관리 실수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대학입학 좌절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 나에게 또 한 번 인생 길잡이 역할이 되어준 친구가 바로 오디션에 함께 나갔던 단짝 박순미다.  졸업 1년 후 그녀는 서라벌예술대학교(현 중앙대 예술대학) 음악과 입학원서를 구해 와서 진학을 권유했고 그 덕에 대학생 가수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절친으로 우정을 쌓아가고 있는 그녀야말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두 번이나 안내한 은인이다.   

 

목숨 건 베트남전 위문 공연

데뷔하기가 무섭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니 서울로 올라온 지 2년도 안 된 열아홉 살 시절 나의 시계는 무지 바쁘게 돌아갔다. 낮에는 학교를 오가면서도 방송국과 행사장에 나가 공연을 하고 밤엔 극장쇼의 히어로가 되어 화려한 조명과 대중의 인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스타의 날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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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신민요의 여왕’이었다. 민요는 현대가요에 가려져 기생들이나 부르는 노래로 괄시받던 시대였다. 세상의 편견도 심했지만, 무엇보다도 양악 반주에 맞게 민요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나만의 창법으로 ‘신민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했다. 더욱이 그 시기 대중가요계는 트로트와 번안 가요가 유행이었음에도 〈갑돌이와 갑순이〉 〈새타령〉 등의 민요로 히트곡을 내자 ‘국보’라는 애칭까지 얻으면서 청와대 외국사절 행사와 재벌가의 파티에 단골로 초청되기도 했다. 

부침도 심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민요로 대중의 인기를 받다 보니 가요계에서는 ‘왕따’ 취급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존재감을 더욱 키워주고 노래 열정에 에너지가 되어준 것은 베트남전에 참가한 한국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이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군부대를 돌며 위문 공연을 펼쳤다. 한번 출국하면 한 달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목숨을 걸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전시상황이었지만 수많은 파병 한국 군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는 나에게 생명의 위험마저도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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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연에 참가한 가수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어렸지만,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을 정도였고 공연이 끝나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군인들에게 사진 촬영과 사인을 해 주곤 했다. 

이쯤 되고 보니 당시 월남 파병 용사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늘 1위를 차지했고, 1967년부터 1970 년까지 월남 위문 공연 4회라는 최다 참석 기록을 세웠다. 

‘월남’하면 김세레나, ‘김세레나’ 하면 월남으로 불리면서 ‘원조 군통령’으로 인기를 끌었다. 

공연장에 폭탄이 터졌는데 불발탄이라서 살아난 적도 있었다. 목숨 건 공연이었지만 오로지 애국심 하나만 갖고 우리 국군장병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지나고 나니 값진 이력이 됐다. 

주월한국군사령부 군 연예대 소속으로 베트남전 위문 공연 참전 사실을 인정받아 참전유공자가 됐다. 언제부터인가 연금도 나오고 몸이 아프면 보훈병원도 갈 수 있는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고 있다. 

 

타고난 재주, 무대밖에 모르는 사람

히트곡은 잇달아 탄생했다. 〈꽃타령〉, 〈까투리 사냥〉, 〈성주풀이〉, 〈창부타령〉, 〈울릉도사랑〉 등 70년대 초반까지 줄을 이었다. 1969년도 부른 〈짚새기 신고 왔네〉는 당시 흑백 TV 최초의 드라만 주제곡으로 과분한 사랑을 받은 노래로 아직도 내 귓전에서 메아리치곤 한다.

뒤돌아보면 후회 한 점 없을 만큼 노래를 불렀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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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열었던 데뷔 10주년 기념 리사이틀공연은 내 인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무대로 남아 있다. 그해 10월 4일간 하루 2시간씩 1일 4회 공연을 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지만 목이 쉬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 또한 신기했다. 예나 지금이나 무대에만 서면 나도 모르고 있던 잠재적인 끼가 발산되고 체력이 뒷받침해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시절 무대 관계자는 이런 얘기를 했다.  “김세레나는 젊고 미모도 뛰어나지만, 그보다도 다재다능한 만능 탤런트다. 노래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춤도 잘 추고 입담도 코미디언을 무색게 할 정도다. 그러니 세레나가 무대에만 오르면 그 무대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라고. 

인기만큼이나 수입도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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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쇼에 오르면 하루 수입이 5만 원에 달했다. 나이가 어려서 그랬을까? 돈에 대한 가치를 잘 몰랐으니 관리도 잘하지 못했다. 요즘 젊은 연예인들처럼 돈을 벌면 저축을 하여 빌딩도 사고 재산증식에도 신경을 쓰는게 현명한 일이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을 계산하면 어마어마하다. 

오죽하면 ‘김세레나 돈은 보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했겠는가? 다시는 안 빌려주겠다고 다짐해도 또다시 빌려주고 떼이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20대 시절 동료 가수가 큰돈을 부탁하여 아무 생각 없이 빌려 줬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묵묵부답의 세월이 수십 년 흘렀지만, 그마저도 다 용서하고 잊기로 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사노라면 내 의지나 노력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사랑과 이별이 그렇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인한 아픔과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았지만 난 그때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훌훌 털어버리고 씩씩하게 가수로서의 내 자리를 지켰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는 노래이니까.     

 

정 많은 인생, 사람이 재산

뒤돌아보면 지난 60여 년 동안 나는 참 행복했다.  20대 시절만큼 화려한 날들은 아니었을지라도 중년 장년 시절은 물론이고 고희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내가 오를 수 있는 무대는 계속 이어졌다. 전국 각 지방에서도 해외에서도 여전히 김세레나를 기억하는 이들은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와 달라고 손짓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할 틈 없이 무대 위에 올라 팬들을 만났다, 한번 다녀오면 이듬해 어김없이 다시 불러준다. 그러니 그 감사함에 내 나이를 잊은 열정으로 젊은 시절 못지않게 무대를 뜨겁게 달구곤 했다, 약속은 두 곡이었지만 팬들이 원하면 네곡 다섯 곡도 아낌없이 쏟아냈다. 나도 팬들도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집합금지 상황이다. 지금의 나는 인기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무대를 찾지는 않는다. 노래는 내게 숙명이고 소리가 닿는 한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게 소망이지만 누구도 예기치 못한 지금의 현실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니 그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노래 못지않게 나이 들면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내 삶에서 최고의 휴식이고 안식이었다. 젊은 날엔 장거리 여행을 많이 갔지만 근래에는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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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행으로 갑갑한 마음을 달래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루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해 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존재가 있다. 다름 아닌 내 최고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지인들이다. 

 “고구마하고 사과 좀 보냈습니다.”  “내일은 꼭 함께 점심 먹어요.”

나이 들수록 어딜 가도 반겨주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저 가수로서 내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뿐인데 한결같이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이다. 그래서 욕심 아닌 진심을 품게 된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지 콘서트도 열고 디너쇼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나의 영원한 사랑이자 애인은 노래이기에 나를 기억하는 팬들과 노래로 만나야 하니까. 꽃 피는 봄날엔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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