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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진성 "한으로 눌러 담은 40년 트롯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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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으로 눌러 담은 40년 노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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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공감대 불러일으킨 트롯계 대들보

   

누군가는 화려한 율동과 얼굴만 보인다또 누군가는 목소리만 들리거나 가사만 가슴에 와닿는다그는 다르다애절함과 간절함이 녹아든 목소리에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인생 가사가 들린다그의 얼굴 표정에서도 굴곡진 인생이야기가 그려진다

요즘 대세’, ‘트롯계의 BTS'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진성 이다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인생 토크쇼에서도 한결같이 차분하면서도 사뭇 진지하고 또 시선을 집중시키는 그의 50여 년 노래 인생과 62년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글 박창수 기자)


WHO is...1

진실이 공감이 된 휴머니즘 가사와 타고난 목소리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첫 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구성지면서도 절절한 목소리가 애간장을 녹인다중 장년층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겪었던 젊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랫말이다

기차역 대합실 석탄난로 주변을 서성이며 이제 오나 저제 오나 누군가를 기다리던 날의 추억이 있다손에 쥔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 문자 메시지 한 줄이면 소통이 이루어지는 21세기 이지만 노래 안동역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아릿하게 잊혀져가던 지난 세기의 추억과 애틋한 사연을 다시 불러들였다. 


안동역에서는 목소리 자체가 ()’으로 평가받는 진성의 목소리와 가사의 궁합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면서 2012년 발표와 동시에 대히트를 쳤다트로트계의 새로운 대스타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노랫말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녹고 녹이이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얻었고 2014년에는 역 앞에 노래비도 생겼다진성은 안동역을 알린 공로로 명예역장이자 안동시 명예시민으로 임명되었다지금도 안동역에서 열차가 출발할 때나 도착할 때면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실 노래비는 저도 예상 못했던 일이죠처음부터 노래 가사가 가슴에 와 닿고 느낌이 좋았습니다발표하자마자 반응이 기대 그 이상이었죠그런데 노래비까지 세워지게 되니 정말 기뻤습니다가수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겁니다노래비가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인거죠저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준 노래였습니다.”


안동역에서를 발표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10대 시절부터 노래를 불렀다이 노래 이전에도 그에겐 님의 등불’, ‘내가 바보야’, ‘태클을 걸지마’ 등 다수의 곡들이 있었다트로트계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가수였고 이중에서도 태클을 걸지마가 좋은 반응을 얻긴 했지만 안동역에서의 아성에는 못 미쳤던게 사실이다.


그가 부른 노래들은 가사가 하나같이 보통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헤집고 들어온다실체 없이 그저 그런 흔한 사랑 타령이 아니라 인생길에서 누구든지 느껴보고 겪어본 진실의 냄새가 스며들어있다.

안동역에서로 스타 반열에 오른 그를 한 번 더 가요계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 시킨 것은 4년 후 발표한 노래 보릿고개였다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60년대 70년대 가난했던 시절과 어머니의 모습을 더듬어가는 애절한 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노래는 부르는 이의 가슴 속으로 눈물 한 줄기 흘러내리게 하는 특별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아야 우지마라 배꺼질라,,,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시절을 어찌 사셨소...,’

노랫말과 리듬은 한 많은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물론 중요한 것은 진성이 불렀기에 더 빛을 발했던 게 사실이다그에게는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남다른 사연이 삶 속에 젖어들어 있었던 데다 듣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있었으니까.


제 노래이지만 늘 부를 때마다 그야말로 제 마음은 울고 또 울고 그랬습니다제 얘기나 다름없었고 저에겐 켜켜이 쌓아둔 한 이었으니까요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노래이지만 이 노래를 통해 저 스스로를 제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져주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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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2 

고단했던 삶과 인내로 엮은 40여 년 노래 인생 꽃이 피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안방을 뜨겁게 달구며 국민의 마음을 위로했던 트롯 경연대회에서 진성은 심사위원석에 앉았다. 역시 대세 가 수이니 그가 앉아야 할 당연한 자리였다. 심사위원석엔 이름 꽤 알려진 다른 가수들도 여럿 앉아 있었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진성에게 비칠 때 마다 그의 얼굴은 곧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그려내고 있 었다.


<미스터트롯>에서는 열네 살 정동원, <보이스트롯> 열세 살 김다현 같 은 10대 초반의 어린 가수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아이답지 않게 목소리 는 물론이고 표정까지 가사를 녹여낸다. 그럴 때마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가수들은 감동의 감탄사를 쏟아냈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먼 저 글썽거렸다.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면 눈을 질끈 감곤 했다. ‘국민 손 자’가 된 정동원이 예선에서 <보릿고개>를 부를 때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김다현이 3라운드에서 <천년 바위>를 부를 때 ‘생은 무엇인가요, 삶은 무엇인가요’라는 노랫말을 풀어낼 때는 누가 볼세라 눈물을 훔치는 그의 모습으로 카메라가 향해 있었다. 건장하고 슈트 차림이 남다른 멋진 중년의 가수 진성은 왜 그렇게도 눈물을 자주 보였을까?


그는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의 지난날을 속속들이 모르고 있던 팬들 에게는 그야말로 충격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설마 유명가수이면서 늘 안정감 있어 보이는 그에 게 그토록 아픈 사연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세 살 때 부모님과 헤어졌어요. 나는 부모 없는 ‘고아’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차라리 부모님 이 나를 고아원에 데려다 놓고 가지 왜…. 밥 한 끼만 배불리 먹어도 행복하다고 느꼈으니까요”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유년 시절은 굴곡진 인생 그 자체였다. 다시는 되돌 아가고 싶지 않은 긴 터널 같은 시간이었다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살 지 못했던 슬프고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어린 시절 정말 배가 고팠다고 했다. 고구마나 감자를 얻어먹기 위해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 를 불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어머니를 따라가려던 자신을 외삼촌이 못 가게 잡았다. 오 죽하면 그 시절 부모를 자신의 인생의 원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세 살 때 헤어진 후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열 한 살에 엄마를 만났으나 다시 헤어져야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기구한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배고픔과 가슴의 상처를 안고 친척 집에서 눈치 보며 자라던 진성이 가수의 꿈을 안고 진안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1973년 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네 살이었다. 아는 이도 없고 마땅 히 갈 곳도 없갈 데 없이 서성이던 소년은 재워주고 먹여준다는 말만 믿고 한 남자를 따라갔다. 중국음식점 이었다.


“그곳에서 일을 했어요. 몸은 고되어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죠. 나 름대로 꿈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1970년대 초반 그 시절만 해도 아이들이 방송에 나가지 못했던 때죠.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옷 깔끔하게 입고 아름아름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없는지 찾아다녔습니다.”


긴 긴 무명시절을 보냈다. 트롯계의 빼놓을 수 없는 이미자와 나훈아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위로 를 받았다. 10대 시절을 그렇게 보낸 그는 20대 초반 유랑극단과 극장 쇼단을 찾아가 무대에 서 게 됐다. 80년대 밤무대 활동을 주로 하면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노래를 자주 불렀다. 무명시절이 길어지면서 한때는 자신의 터프한 이미지를 바꿔보고자 예명을 여성적인 이름으로 바꿔보기도 했단다.

‘최윤진’이라고. 1994년 <님의 등불>로 데뷔했지만 TV 방송에 자주 등장할 만큼 소위 ‘뜨는 가수’로 주목받진 못 했다. 무명시절은 지속됐고 대중에게 주목받기 전엔 밤무대에서 ‘카바레 지르박’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안동역에서>로 주목받기 이전에 고속도로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메들리가 200만 장 가까이 팔리면서 길거리 차트 ‘메들리 4대 천왕’으로 불리더니 2005년 발표한 <태클 을 걸지 마>는 매스컴을 통해 그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곡이 됐다.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그래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 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가사에는 그의 부초같이 고단했던 인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친 산소 앞에서 떠오르 는 삶의 애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쓴 노랫말이었다.


미스터트롯 심사위원 당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난 그때 심정을 진성은 이렇게 밝혔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른 나이에 너무 벅 찬 세월을 보낸 만큼 동원이를 보며 노랫말을 들으니 더 그랬어요. 사실 보릿고개 가사는 제가 20여 년 전 배고픔과 서러움을 견디며 무명가수로 살던 시절 직접 쓴 가사였어요. 정동원이 노래 할 때 그 시절이 떠오른 겁니다. 동원이 나이 때부터 노래하며 오직 하나 가수가 되는 길만을 향 해 굴곡진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으니까요”었다.

무작정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땅에 발을 내디딘 곳은 용산역이었다.


오갈 데 없이 서성이던 소년은 재워주고 먹여준다는 말만 믿고 한 남자를 따라갔다. 중국음식점 이었다.
“그곳에서 일을 했어요. 몸은 고되어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죠. 나 름대로 꿈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1970년대 초반 그 시절만 해도 아이들이 방송에 나가지 못했던 때죠.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옷 깔끔하게 입고 아름아름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없는지 찾아다녔습니다.”

긴 긴 무명시절을 보냈다. 트롯계의 빼놓을 수 없는 이미자와 나훈아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위로 를 받았다. 10대 시절을 그렇게 보낸 그는 20대 초반 유랑극단과 극장 쇼단을 찾아가 무대에 서 게 됐다. 80년대 밤무대 활동을 주로 하면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노래를 자주 불렀다. 무명시절이 길어지면서 한때는 자신의 터프한 이미지를 바꿔보고자 예명을 여성적인 이름으로 바꿔보기도 했단다.

‘최윤진’이라고. 1994년 <님의 등불>로 데뷔했지만 TV 방송에 자주 등장할 만큼 소위 ‘뜨는 가수’로 주목받진 못 했다. 무명시절은 지속됐고 대중에게 주목받기 전엔 밤무대에서 ‘카바레 지르박’이라는 닉네임으 로 활동했다. <안동역에서>로 주목받기 이전에 고속도로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메들리 가 200만 장 가까이 팔리면서 길거리 차트 ‘메들리 4대 천왕’으로 불리더니 2005년 발표한 <태클 을 걸지 마>는 매스컴을 통해 그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곡이 됐다.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그래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 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가사에는 그의 부초같이 고단했던 인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친 산소 앞에서 떠오르 는 삶의 애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쓴 노랫말이었다.
미스터트롯 심사위원 당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난 그때 심정을 진성은 이렇게 밝혔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른 나이에 너무 벅 찬 세월을 보낸 만큼 동원이를 보며 노랫말을 들으니 더 그랬어요. 사실 보릿고개 가사는 제가 20여 년 전 배고픔과 서러움을 견디며 무명가수로 살던 시절 직접 쓴 가사였어요. 정동원이 노래 할 때 그 시절이 떠오른 겁니다. 동원이 나이 때부터 노래하며 오직 하나 가수가 되는 길만을 향 해 굴곡진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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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선물은 아내와의 만남


누구인들 울퉁불퉁 거친 인생길을 걷고 싶겠는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꽃길만 걷고 싶은 게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진성에게는 애당초 꽃길이 없었다. 적어도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그랬다.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그에게도 귀인이 나타났다. 바로 아내 용미숙 씨다.
“12년 전 우리 용 여사를 만났어요. 그 시절 제가 건강을 좀 챙기겠다고 추어탕 집을 자주 다녔 습니다. 단골집이었죠. 사장님이 제 앨범을 챙기고 다니는 여성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라는 거였어 요. 그분이 보고 싶어 한다고요”
결혼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팬 중의 한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만났다. 그게 인연이 었다. 몇 차례 더 만나면서도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결혼을 고민할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

한번은 아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양평 별장에 갔었다. 각자 열심히 살아왔고 서로에게 부담이 되 는 사이는 되지말자는 이야기까지 나눈 후였다. 하지만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그 무렵 방송 출연을 앞두고 노래 연습을 해야 했지만, 그에게는 시스템을 갖춘 변변한 연습장이 없었다. 그때 심정을 그는 여과 없이 밝혔다.


“성격상 여자 덕이나 보려는 그런 추잡한 생 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내가 별장을 연습 공간으로 활용해보라고 하더군요. 그 제의가 싫진 않았습니다. 저에 겐 절실한 일이었으니까요. 더 놀라운 것은 이튿날 곧장 음향시스템 장비를 세팅시켜 주더군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었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아 내는 소녀 가장으로서 동생들과 어머니를 책임지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힘들었던 세월 을 거쳐 온 아내의 얘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 은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파 트너가 됐다. 방송에서 그는 ‘아내의 배려가 향긋한 가을바람처럼 불어오고 그러면서 내 마음의 뚜껑이 열리더라’고 로맨스가 시 작되던 그 시절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다.

향긋한 바람처럼 다가온 용미숙 씨와 2009 년 그의 나이 50세에 결혼을 했다. 진성은 아내를 만나면서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3년 후 발표한 <안동역에서>는 바로 두 사람이 함께 피운 행복의 신호탄이 됐다. ‘가족’이라는 사랑에 목말랐던 그였으니 뒤 늦은 결혼이 심적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 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안동역에서>의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고 롱 런하는 가운데 2016년 그는 오래전 자신이 써 놓은 가사에 애절한 리듬을 입힌 <보릿 고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트롯계 진성시대가 왔음을 못 박았다. 동료 가수들과 콘서트도 열고 방송에도 자주 등장했다.
참으로 묘한 게 인생이라고 했다. 긴긴 세월 고생을 하며 살아온 후유증이었을까? 그해 12월 그 에게 림프종 혈액암과 심장 판막증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투병을 시작했다. 자신을 간호하느라 입원실 간이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미안함과 속 깊은 사랑에 그는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아내를 떠나려 하기도 했단다.

“지금도 투병 생활을 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백도라지가 몸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내가 심마니와 함께 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걸 캐다가  바위에서 굴러떨어진 겁 니다. 머리를 여섯 바늘이나 꿰매고 얼굴이 엉망진창이 됐는데도 저에게 숨기려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날 아내 몰래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때 ‘이 여자만큼은 인생을 바쳐 지켜야겠다’라고 결심했다는 진성. 투병 중에도 각종 방송프로 그램에 등장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가지 마>라는 곡을 발표하여 팬들의 사랑을 이어갔다. 사람 의 힘은 역시 놀라웠다. 아내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한적한 전원주택 마을에 있는 집 텃밭에 서 채소를 가꾸고 직접 담근 장들과 각종 약초를 먹으며 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언젠가 그는 한 방송에서 아내에게 수입을 90%를 다 준다는 얘기를 했다. MC와 시청자들은 놀 라워했지만, 그에게는 돈보다 아내가 더 소중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인생의 절반을 넘어 만난 아 내야말로 세상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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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내려앉기를 추구하는 스타


투병 생활을 극복한 진성은 2019년 9월 MBC <놀면 뭐하니> 트롯 편에 출연했다. 유재석에게 ‘유산슬’이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시청자들과 한층 더 가깝게 다가섰다. 본래 그는 방송 토크 무대보다는 라이브 무대를 선호하는 진정한 가수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의 팬데믹은 연예인 들이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설 무대를 쉽게 허락하지 않은 한 해였다. ‘요즘 대세’라는 인지도 와 인기를 반영하듯 그는 본의 아니게 바쁘게 방송가를 오갔다.

<내일은 미스터트롯>과 <보이스트롯>의 심사위원으로 <트롯신이 떴다>에서는 팀 코치 선생님으로 또 <히든싱어6>에서는 세 번째 원조 가수로 등장했다. 전례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에 등장한 그가 솔직하고 친근한 입담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사로잡으며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국민과 소통하 면서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하는 시간이 됐다.

무엇보다도 많은 팬들은 그가 걸어온 40여 년 무명 가수 시절의 이야기와 투병 생활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일화들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으 면서 감동했다. 그리고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들은 ‘가수 진성’ 못지않게 ‘인간승리 진성’에게 축하와 위로 그리고 응원의 메시지 보내며 무엇보다도 그의 겸손함과 진실을 높이 평가했다.


‘예스터데이’에서 어린 가수 김다현이 그의 데뷔곡인 <님의 등불>을 부르던 도중 즉석 듀엣을 요 청했던 무대가 그랬다. 주저함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간 그는 김다현에게 마이크의 비중을 실어주 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환상 듀엣 무대라는 찬사와 함께 역시 배려와 겸손함을 한껏 드러냈다.

지난해 6월 진성은 신곡을 발표했다. <못난 놈>이다. 이 노래의 가사가 또 한 번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대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남 속이고 사는 게 그리 좋더냐…. 애비 생각나지도 않더냐….
올바르게 살라고 그리 가르쳤구먼….’
<안동역에서>와 <보릿고개>에 이어 또 한 번 히트곡이 되어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것 같은 조짐이다.

2020년 한 해는 한국의 트롯이 힘차게 다시 솟아오른 한 해였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아랑곳없 이 대한민국 남녀노소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한국인의 가슴에 공통분모로 숨어 있는 한과 리듬 의 정서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이런 트롯 열풍의 중심에 진성이 서 있었다. 이 미 전설이 된 이미자 나훈아 남진 등의 선배 가수들의 뒤를 잇는 자타공인 트롯계 대들보임에 틀 림이 없다.

그가 한 방송에서 은퇴 시기를 내비친 말은 안방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폭탄선언이나 다름없 다. 6~7년 후 자신의 가수 인생에서 내려앉기를 감행할 작정이라고 밝힌다. 그야말로 날로 치솟 는 인기가수가 은퇴를 거론하다니 어찌 된 일인가?

“저는 라이브 가수입니다. 40~50년 노래만을 위해서 살아오다 보니까 그간 살아온 인생을 되돌 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60대 후반 즈음엔 낙향하여 전원생활 하면서 나를 돌아다보 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것도 필요 하니까요”


물론 그가 노래와 이별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70대 중후반도 아닌 60대 초반의 그가 방송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때가 되면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에는 겸손의 미덕이 더 빛을 발한 다. 팬들은 그가 계획하고 있다는 은퇴 선택에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십 년 아니 이 십 년은 더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국민청원’ 하는 일이 생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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