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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세온의 가요 100年史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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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온의 가요 100年史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봄 기 운 처 럼 피 어 나 는 

원 조 한 류 노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갈 때는 딱딱한 딱지 위에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 새 살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돋아난 새 살은 더 뽀얗지만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똑같은 살결을 지닙니다. 1961년도에 발표된 한 곡의 대중가요는 분단과 전쟁 그리고 복잡한 정치 현실에 치인 우리 국민에게 새봄을 알리는 기쁨의 팡파르가 되었습니다. 새봄이 필요했던 그 시절,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리듬으로 국민들 가슴 속에 샛노란 희망을 심어주던 그 노래 <노오란 샤쓰의 사 나이>와 함께 가요 100 년사를 열어봅니다.

글 가수 이세온  사진 PEOPLE365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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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KBS 가요무대 출연>


일본·프랑스 가수들도 리메이크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BTS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훨씬 전에도 대한민국은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는 우리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 가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로 ‘미성(美聲) 가수들의 시대’에서 ‘개성가수시대’로의 전환점이 된 가수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입니다.

대중음악으로는 최초로 해외 진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한류 1호’로 평가받는 이 노래는 프랑스와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 북한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민간외교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시인의 혼(L’ame Des Poetes)’의 가수로 ‘에디뜨 삐아프’, ‘줄리 에뜨그레꼬’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했던 샹송 가수 ‘이베뜨지로’(Yvette Giraud)가 리메이크해서 한글로 이 곡을 취입한일은 당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증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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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KTV 다시보는 문화영화> 


서울시민회관에서 가졌던 1963 년 그녀의 내한공연에서는 마치 한글을 알기라도 하듯이 섬세하면서도 역동감이 넘치는 표현력으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울려 퍼집니다. 일본에서는 하마무라 미치코 등이 리메이크하고 동남아 각국 가수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등 대한민국의 문화적 잠재력은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글로벌 한 신고식을 마쳤습니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1961년 손석우(孫 夕友)가 작사·작곡한 곡으로 당시 미8군에서 노래하던 가수 한명숙이 취입하여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1961년 12월까지 5만 장이라는  최다 판매량을 기록하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노란 셔츠까지 끼워 파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지금의 인기 아이​돌의 굿즈처럼 말이죠.  6·25전쟁 이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궁핍한 삶을 살고 있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의욕을 북돋아 주고 꿈과 희망을 안겨준 이 노래는 다소곳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당연시되던 사회적 분위기에 여성의 직설적 화법을 보여준 최초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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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KTV 다시보는 문화영화>


당찬 느낌을 주면서 새로운 리듬과 노랫말로 가요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면서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의 주류로 부상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사의 전개 방식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당시 가요는 유절형식이 유행이었으며, 산문으로 가사를 만들었고, 후반부는 반했습니다. 유절형식은 두 개 이상의 절을 지닌 가사에 대하여, 제1절에 붙인 가락을 제2 절 이하의 가사에서도 쓰게 만든 작곡 형식을 말합니다. 표현도 은유법보다는 당시로써는 최초로 직설법을 선택해서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2분의 2박자에 내림나장조로 되어 있는 스윙 리듬(swing rhythm)에 미국의 컨트 리송(country song)을 모방한 듯한 선율과 미국 서부음악 중의 하나인 힐리빌리(hily bily) 를 모방한 이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트롯의 강세 속에서 1960년대 초 대중음악의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옵니다.

 
미8군에서 노래한 고향 그리워하던 실향민 가수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낸 파란만장한 인생사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광복 후 홀로 월남하여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고, 가수 한명숙은 유치원 보모였던 어머니와 외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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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KBS 가요무대 출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용과 노래로 학예회를 주름잡기도 했습​니다.

당시 평양음대 교수인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양의 고전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노래에 소질이 있어 합창단원으로 활약하며 음악 대학의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 꿈을 접고 진남포제2여고에 재학 중이던 16살 때, 다행히 해군통신부대원과 인연을 맺게 되어 잔일을 도와주며 해군함정을 타고 인천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려웠던 시절 오르간을 치며 노래 연습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를 졸업한 외삼촌 김재섭의 평양음대 제자인 드럼연주자 이원근 씨를 만나게 되고 그의 추천으로 ‘태양악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드디어 1953년 당시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 19살의 나이로 들어가게 되고 럭키쇼단에 뽑힌 이후 세븐스타쇼, 에이원쇼 등으로 활동을 넓혀 나갔습니다. 

다만 북한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영어를 전혀 접하지 못하고 러시아어를 배운 한명숙은 영어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 노래를 녹음해주고 일일이 가사를 적어주었던 음악평론가 이백천 씨의 도움으로 점차 어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영문과 출신인 그는 당시 미8군 무대에서 알토 색소폰 주자로도 활동하며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또 쟈니카슨쇼로 유명한 사회자 쟈니윤 역시 당시 한명숙 씨의 매니저 일을 봐주기도 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고마운 인연들과 서로 도와가며 힘든 나날들을 이겨내며 한명숙은 점차 큰 무대로 적응해 나갔습니다. 꺼끌꺼끌한 알토톤으로 블루스를 맛깔나게 부르며 패티 페이지(Patti Paige) 노래를 대부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그녀는 이미 미8군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영화로도 제작

6~7년간 미8군 무대에서 내공을 쌓던 중 가수 최희준을 통해 작곡가 손석우를 소개받게 되고 그가 작사·작곡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내놓게 됩니다. 작곡가 손석우는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로 잘 알려진 〈청실홍실(송민도 안다성 노래, 1956년)〉을 비롯해 <나 하나의 사랑(송민도)〉, 〈검은 장갑(손시향)〉, 〈꿈은 사라지고 (최무룡)〉, 〈나는 가야지(문정숙)〉, 〈이별의

종착역(손시향)〉 등을 작곡했던 실력파 음악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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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TV 조선 대찬인생 출연 >


당시 KBS 악단 지휘자로 늘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던 작곡가 손석우는 기존의 가수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가진 가수 한명숙을 처음부터 눈여겨 봐왔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적 세계는 상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대중들의 선호와 음반 판매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음악적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심 끝에 스스로 자기 뜻을 펼쳐보고자 60년대 초 ‘뷔너스레코드사’를 만들고 스스로 음반 제작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뷔너스레코드사의 첫 번째 음반인 《손석우 작곡 집-노오란 샤쓰의 사나이(V L-1)》의 타이틀곡으로 발매됩니다.

처음에는 너무 밝은 이미지로 ‘동요에 털이 달린 노래다’라며 좋지 않은 반응도 있었고 무명가 수가 부른 노래여서 별 볼 일 없다는 이유로 레코드 가게에서 회수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국면전환용 노래로 선택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당 시 대한민국 음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곡이 되었습니다. 

경쾌한 서구 팝의 시작을 알렸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허스키하고 끈적끈적한 목소리의 가수 한명숙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붐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엄심호 감독이 연출, 신영균, 엄앵란, 한명숙 주연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1962년 3월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초만원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를 부른 가수가 직접 출연한 영화는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인파가 너무 몰려 영화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가수 한명숙은 이 영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수 생활에만 전념합니다.

​‘장한 어머니상’에 이어 ‘국민문화훈장’ 받은 원로가수

이후 작곡가 손석우 씨와 함께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검은 스 타킹〉, 〈시름의 꼬리별이〉, 〈센티멘탈 기타〉, 〈선유가〉,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등을 잇달아 발표 합니다. 이어 작곡가 김인배 선생의 작곡 데뷔곡인 〈삼별초〉, 〈너는 말했다〉를 비롯해 〈그리운 얼굴〉, 〈울고 웃는 인생〉, 〈강가에 피는 꽃〉, 〈딸이 더 좋아〉 등도 잇달아 발표합니다.

또 손목인 작곡의 〈내 별은 어느 하늘에〉, 이봉조 작곡의 〈비련십년〉, 〈세월〉, 이희목 작곡의 〈으스름 달밤〉 그리고 1964년에는 전오승 작곡의 〈사랑의 송가〉와 당시 동아방송 캠페인 송이었던 〈걸어서 가자 (듀엣 강수향)〉 등등 수많은 곡을 발표하고 명실상부한 최정상의 자리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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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라디오를 켜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수 한명숙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

​라 해외공연도 많았습니다. 특히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빅히트한 나라마다 공연 요청이 쇄도 했고 음반 사인회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해외공연에서 돌아오면 각 방송국 PD들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 직접 공연장에서 기다렸다가 데려가는, 이른바  ‘모시기 경쟁’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또 최전방 위문 공연은 물론 파월장병을 위한 위문 공연도 앞장서 왔습니다. 그렇게 전성기 시절을 지나온 가수 한명숙은 남편과의 사별 후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2남 1녀의 자녀를 혼자 키우면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동시에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성대가 손상되어 목소리를 3년간 잃어버리고 노래를 접어야 했던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가수로써 치명적인 성대 수술을 두 차례 나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묵묵히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온 그녀는 1978 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2000년 10월, 국민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수 최백호 씨의 주도로 원로가수 한명숙을 위한 자선공연이 펼쳐진 적이 있습니다. 속칭 ‘강- 부-자 내각’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던 청문회장에서 시작된 장관후보자의 공방회에서 언급된 가수 한명숙 씨의 근황이 문화예술계 원로들의 노후문제에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었습니다. 당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발표 50년을 기념하는 헌정기념공연으로 만들어진 이 콘서트는 가수 한명숙 씨에게 아직도 뜨거운 감동으로 남아 있는 순간이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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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KTV 다시보는 문화영화 >


1961년 발표 당시 뜨거운 반향으로 어둡고 힘들 었던 국민들에게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 넣 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아직도 대한민국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굴절의 인생사 속에서 다시 움츠러 들어야 했던 아픔의 상처들이 이제는 새살이 되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발매 60주년이 되는 새 희망의 전주곡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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